클리셰 비틀기의 힘, Like
평범한 남녀가 낯선 오두막으로 휴가를 왔다가 좀비가 된다는 이야기. 뮤지컬 <이블 데드>는 스플래터 B급 코미디를 표방하며 자신들의 작품을 “일관성도, 개연성도 없다”는 말로 설명한다. 악령이 씐 손 때문에 의도치 않게 몸 개그를 하거나 좀비가 되자 걸쭉한 입담을 뽐내는 것들은 모두 동명의 영화로부터 수혈 받은 것이다. 대신 뮤지컬은 8~90년대 공포영화의 클리셰와 뮤지컬 넘버의 특수성을 비트는 것으로 존재이유를 드러낸다. 주변의 상황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셰럴은 의문의 소리에 혼자 나갔다가 가장 먼저 좀비가 된다. 여기까지는 공포 영화에서 익숙하게 볼 수 있는 설정이다. 그러나 뮤지컬은 “낯선 소리를 들었을 때 절대 다른 사람을 깨우지 말고 혼자 나가서 살펴보라”는 엄마의 말도 안 되는 대사가 더해져 그 공식을 살짝 비튼다. 무엇보다도 뮤지컬은 이들이 처한 상황과는 정반대의 음악으로 영화와는 다른 재미를 만들어낸다. 마트에서 만난 애쉬와 린다는 자신들의 사랑을 일상적인 가사로 노래한다. 그러나 이들의 노래는 오페라 마냥 웅장하기만 하다. 여자친구들이 모두 좀비가 되어 사망한 후 애쉬와 스캇이 부르는 노래는 놀랍게도 탱고다. 좀비들은 흥겹게 쿵짝거리며 동참을 권하고, 올해는 네크로노미콘에 EDM까지 더해졌다. 다채로운 음악이 공포 대신 코미디를 담당하는 셈.
1차원적 개그, Dislike
문제는 뮤지컬에서 추구하는 B급 코미디가 많은 이에게 익숙하지 않다는 것에 있다. 변화하는 인권 감수성으로 이 작품을 봤을 때 공포 영화의 클리셰라 해도 백인 금발 미녀의 백치미, 작은 키와 외모를 희화화하는 코미디는 더욱 그렇다. 여기에 서사의 개연성마저 부족하니 관객이 작품의 세계관 자체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블 데드>는 필연적으로 불편함만 가득한 작품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이블 데드>는 작품과는 동떨어진 방식으로의 코미디를 시도한다. 말장난 같은 1차원적인 개그가 극 전체에 가득하고, “실화냐”나 “오지고 지린다” 같은 유행어에 집중한다. “아이 엠 그루트”를 외치는 나무의 습격에 반응이 없으면 “1,400만 명이 봤는데도 모르나봐” 같은 부가적인 설명까지도 추가된다.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한 방도인 것은 확실하지만 군더더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런 작품의 코미디는 실제로 벌어진 상황 안에서 고군분투하는 인물 그 자체에서 쏟아져 나온다. 특히 관습을 깨는 음악은 차이에서 오는 매력을 만들어내며 코미디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무대 위 인물들이 진지하게 상황에 몰입하면 할수록 <이블 데드>만의 코미디는 살아난다는 의미다. 하지만 지금의 <이블 데드>는 원작 뮤지컬이 가진 코미디와는 다른 것을 시도함으로써 오히려 작품 자체가 어긋난 채 움직인다. 쉴 새 없이 분출되는 배우들의 에너지도 그 의미가 퇴색되어 버렸다. 많은 사람이 <이블 데드>의 매력을 실시간으로 객석에 뿌려지는 피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그 장면을 위해 100분의 불편하고 지루한 시간을 꼼짝없이 견뎌야 한다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