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여섯 주 여섯 번의 댄스 레슨>, 배우 지현준 (텐아시아)

종종 캐릭터에서 배우의 결이 보일 때가 있다. 극적인 스토리보다 사소한 일상을 덤덤히 그려내는 작품일수록 더욱 그렇다. 연극 <여섯 주 여섯 번의 댄스레슨>(이하 <댄스레슨>)에서 마이클 역을 맡은 지현준이 궁금한 건 그래서였다. 제 나이보다 마흔 살이 많은 황혼의 여자에게 사교댄스를 가르치는 마이클은 눙을 치다가도 어느새 그녀 옆에 앉아 이야기를 경청하고 상처 입은 여자의 손을 잡아준다. 느끼하기보다는 다정하고, 예민하기보다는 섬세한 남자. 지현준이 동성애자를 흉내 내기 대신 진심으로 그들의 야이기를 듣고 깨끗하게 무대에 선보이는 순간, “당신은 여기 분명히 존재하고 있어요”라는 대사는 마이클과 릴리(고두심), 관객을 향한 위로의 편지로 돌아온다. 뮤지컬 <모비딕>을 함께 했던 윤한은 그런 그를 “나무 같은 사람”이라 말했다. 지현준과 보낸 한 시간은 나무의 나이테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었고, 호탕한 웃음과 함께 돌아온 답변은 묵직해서 내내 마음에 아른거렸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모비딕>의 짐승남이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게이 역을 맡게 됐다. <댄스레슨>의 어떤 지점이 흥미로웠나.
지현준: 예전에 브레히트 작품을 했었는데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 때 존재한다’라는 대사를 보며 제일 먼저 엄마가 떠올랐다. 처음 <댄스레슨> 대본을 봤을 때도 그런 어머니의 뒷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남녀로서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소통이 중요했기 때문에 일반 남자보다는 게이가 작품에 분명히 플러스 요소였고, 어머니로부터 시작했지만 공연을 하면 할수록 게이의 또 다른 면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요즘은 다양해졌지만 그동안은 동성애자를 과장된 방식으로 많이 다루는 편이었다. 다정하되 과하지 않은 마이클로 호평을 받고 있다.
지현준: 정형화된 표현을 그대로 꺼내 쓰자니 식상하고 거기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안 쓰자니 분명 관객들은 그 지점을 기대하고 있을 거고, 또 그런 섬세함이 실제로 그들의 특별함을 나타내주는 지점이기도 했다. 참 아이러니하지. 우연치 않게 그 분들하고 지낼 기회가 생겼는데, 멀리서 볼 때는 ‘아이 참’ 그랬던 부분이 막상 들어가서 얘기를 들어보니 그렇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좋겠고 그래서 ‘흉내 내지는 말자’라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줄을 살짝만 넘어가도 관객 분위기가 싹 달라지기 때문에 쉬운 일은 아니라 감각이 계속 살아있어야 한다.
게이의 스테레오 타입에서 빗겨난 각진 외모도 편견을 깨는 또 다른 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현준: 10년 전 연희단 거리패에 처음 들어갔을 때 이윤택 선생님은 나보고 “참 그리스인처럼 생겼네”라고 하셨었다. 으하하하하. <댄스레슨>이 장년여자에 대한 이야기니까 연출님이랑 ‘만약 아들이 게이라면’ 같은 생각을 많이 했다. 저렇게 멀쩡하게 남자같이 생긴 놈이 게이라는 걸 밝혔을 때 부모 입장의 관객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그 부분을 건드릴 수도 있지 않을까.
극적인 사건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소 밋밋하게 느낄 수도 있는 작품이다. 그 지점에서 걱정이 되진 않았나.
지현준: 사실 외국이름 부르면서 외국농담 하는 것 때문에 우리랑은 동떨어진 엄마 얘기가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세트도 달랑 소파 하나, 냉장고 하나, 오디오 하나. 게다가 난 그동안 상상이나 고전 같이 텍스트 뒤에 엄청난 백그라운드가 있는 걸 좋아했고, 그래야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었다. 라이트한 브로드웨이 연극과 일상성을 어떻게 우리말로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도 많았다. 그래도 관객들이 항상 옆에 있지만 잊고 사는 사람들, 선입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봤으면 했다. 난 연극이라는 게 스쳐 지나가는 일상을 한 번 멈추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다행히 관객들이 잘 들어주시는 것 같다. 공연을 하면 할수록 작은 것의 힘을 느낀다. 사실 장년층이 많긴 하지만 같이 오시는 30, 40대 따님들이 그냥 엄마표 연극인 줄만 알고 왔는데, 엄마로 살고 있는 여자표 연극이라는 말을 해주셔서 참 좋다.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은 2인극을 하기엔 제법 큰 극장이고, 상대 배우는 고두심이다. 주눅 들지 않고 팽팽히 맞서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 같다.
지현준: 처음엔 선생님, 연출님, 나 셋만 있으니 되게 외로웠었다. 연습실은 크고 사람은 없고. (웃음) 사실 좀 치켜세워주고 그런 게 우리나라에서 살아남는 방법 중 하나인데 내가 그런 쪽에 개념이 좀 없어서 걱정도 됐었다. 으하하하하. 그런데 선생님이랑은 서로 욕할 정도로 거리낌이 없다. 완-전 좋아. 항상 내 김밥까지 꼭 챙겨 오신다. (웃음) 리딩 때 제외하고는 선생님이 디렉션을 주시지도 않았다. 얼마나 해줄 말이 많으시겠나. 그런데 그냥 나를 기다려주시고 믿어주셨다. 또 매일 춤을 춰야 했기 때문에 더 편해질 수 있었을 거고, 그런 배우들끼리의 관계가 무대에서도 잘 드러나는 것 같다.
춤으로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진다는 점이 참 묘했다.
지현준: 몸 쓰는 걸 좋아해서 현대무용단에서 춤을 배웠고, 그동안은 혼자 추거나 군무라고 해도 내 것을 표현하는 게 많았었다. 그런데 이번 작품을 하면서 사교댄스에 대한 굉장한 매력을 느꼈다. 여섯 가지 춤 모두가 누가 시작했는지 모르게 가는 시점이 있는데 그때의 희열은 정말 짜릿하다. 죽어도 붙어있어야 되니까 내 것만 고집할 수도 없고 상대방을 알아야 리드도 잘 할 수 있다. 터치라는 부분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다.
마이클과 릴리는 싸우면서 친해지는 스타일인데 실제로는 어떤 편인가.
지현준: 그때그때 다른 것 같은데 요즘은 말이 많이 없어졌다. 예전엔 상황을 바꾸고 새롭게 뭔가 하는 걸 좋아했는데 지금은 기다리는 힘이 좋아졌다. 생긴 것도 이렇고 고집도 워낙 세서 앞에 나설 일이 많았다. 근데 잘 들여다보면 말하는 것보다 같이 있어주거나 들어줘야 하는 순간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
지현준: 일단은 연희단 거리패에서 이윤택 선생님을 만나면서 많이 깨졌다. 그동안 티 안내고 머리로 참 잘 살아왔던 것 같다. 이 사람한테는 이 정도, 저 사람한테는 저 정도. 내 안에서 모든 게 컨트롤된다고 생각했던 놈이었다. 아니다 싶으면 가서 박는 스타일이었는데 아무리 그렇게 해도 선생님은 끄떡없이 욕하셨다. (웃음) 원래 준비를 정말 많이 해서 보여주는 스타일인데 연기를 처음 시작할 때는 그럴 수가 없었다. 못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다 보여줘야만 했다. 거기다 첫 작품이 <갈매기> 뜨레플레프였고, 그 다음이 햄릿이었으니까. 그래서 밀양에 있을 때 위경련으로 만날 실려 갔었다. 한의사는 성격고치라 그러고. 으하하하. 연기하면서 오히려 더 잘 살게 된 것 같다.
대학에서는 다큐멘터리 연출을 전공했고 제대 후에서야 연기에 관심을 갖게 됐다던데.
지현준: 연기 전공 친구들이 도와 달라 할 때 해본 적은 있지만 진지하게 연기에 대한 꿈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 어머니는 내가 항상 외교관이나 법관이 되길 원하셨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나에게 푸시 해주셨던 것들을 배신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티 나지 않는 선에서 살아왔다. 그러다 갑자기 50, 60살 됐을 때 뭘 하면 재밌을까를 생각하다가 뜬금없이 이 생각이 들었다. 아는 게 없어서 무모했을 수도 있다. PC방에 있었는데 오락도 한 판 끝났고 (웃음) 마침 이윤택 선생님 생각도 나서 그냥 연희단에 전화한 거지. 워크숍 있다고 오라 그래서 갔다. (웃음) 그래도 지금은 부모님이 다 좋아하신다. 고두심 선생님이랑 연극 한다고 하니까 뭐 크~게 된 줄 아시겠지만. 으하하하.
배우라는 직업은 치열하게 꿈꿔도 견디기 쉽지 않은 상황이 많은데, 무엇이 당신을 지탱해 주었나.
지현준: 오히려 배우를 하면서는 지금 이게 내가 가는 길이 맞나 아닌가에 대한 생각은 별로 없었다. 무명에 대한 고민도 없었다. (웃음) 그 순간 항상 내 이름은 있었으니까. 교만하고 자존심으로 가득 차있던 내가 나 이상의 기운을 가진 이윤택 선생님을 만난 것도, 당신들이 보기에도 훌륭한 연기를 할 수 있다고 말해준 선배님들도 너무 감사하다. 그리고 7년 전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여자친구한테 잘못한 게 있었는데 새벽기도 40일 다니면 된다길래 오케이 했지. (웃음) 교회 앞에서 담배피던 애가 이럴 줄 누가 알았겠나.
타의로 시작했는데 많은 영향을 받았나보다.
지현준: 내가 가진 것을 뽐내고 내가 재밌어서 하는 것에도 한계가 온다. 어떤 게 진짜인지도 궁금해졌다. 어느 날 내가 고민하던 게 그냥 내 안에서 발버둥 치는 거구나 싶었다. 어차피 연기라는 것도 내가 아니라 캐릭터의 이야기이고, 만나는 사람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다. 그렇게 주변에 관심을 갖게 되니까 점점 듣는 것도 배우게 됐고, 그 사람이 혼자 해낼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도 할 수 있게 됐다. 진짜 고집 1등이었는데. 오히려 새로운 건 밖에서 온다. 이것저것 많이 하다보니까 내가 뭔가를 이렇게 하겠다고 얘기하는 것보다는 안 맞는 옷이라도 남이 주는 걸 입어보면 이런 게 있네, 싶을 때가 있다. 항상 그렇게 하나씩 배워가는 것 같다.
작년엔 SBS <기적의 오디션>에 출연하기도 했다. 연기라는 게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분야도 아니고, 현역에서 활동하던 사람이 오디션에 나간다는 건 사실 상상하기 힘든 지점이다.
지현준: 내 인생 두 번째 전환기였던 것 같다. 10년간 믿고 있었던 연기가 개박살 난거니까. 뭔지는 알겠는데 그 과정이 참 힘들었다. “연기 좋은데 과연 네가 원하는 연기를 초등학교 6학년이 보면 알 수 있을까?”라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그때 나는 누굴 위해 연기를 하고 있나 생각하게 되더라. 그 친구도 내 관객이 될 수 있는데 또 내 생각만 했구나 싶고. 연극은 매번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똑같을 수가 없다. 그래서 컨디션이 아주 좋지 않더라도 가장 솔직하게 표현했을 때와 비슷한 상태의 테크닉을 기억해둘 의무도 있었다. 그런 것들을 깨는 과정이었고, 훨씬 솔직한 내 것을 꺼내야 되겠구나라는 걸 느꼈다.
은연중에 연극과 TV 연기를 구분 짓고 살았나보다.
지현준: 그동안 ‘너희는 연극 잘 몰라’라고 생각하는 게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관객들에게 내려가기 보다는 내가 하는 걸 보고 당신들이 좀 올라와야 되는 게 있어, 그런 마인드였다. <기적의 오디션>을 하면서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객들이 왜 나에게 맞춰줘야 되지?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일상을 살아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배우로서 그런 게 너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내가 10년간 배웠던 좋은 연기를 어떤 방식으로 분산시켜야 될지도 알았고. 충분히 경험한 건 아니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지는 알 것 같다.
<모비딕>에서는 바이올린을 연주하기도 했고, 지금은 춤을 춘다. 연기를 도와주는 여러 능력들이 있는데 재능이라기보다는 엄청난 노력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
지현준: 달란트가 없어서 이것저것 죽어라 하는 거다. (웃음) 잘생긴 사람이 10초 나와서 주목 받을 때 나는 3시간동안 무대에서 뛰고 뒹굴고 피 토하고 그래야 커튼콜때 ‘아, 저 사람이 있었지’ 한다. 으하하하하. 근데 나에겐 참 공평한 일인 것 같다. (웃음) 요즘엔 노래를 배우고 있다. 제일 늦게 시작해서 꾀도 많이 생기고 그만하고 싶기도 한데 그동안 노래할 때마다 걸렸던 지점들이 있어서 배우로서 가장 마지막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부분인 것 같다.
그동안 쌓아놨던 것들을 좀 더 많은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게 돼서 뿌듯할 것 같다.
지현준: 이 연극도 그렇다. TV에 나왔으니까 캐스팅이 된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니다. 옛날에 같이 고생하면서 기획했던 친구들이나 작은 기사 써주셨던 기자 분들이 10년이 지나니 어느 정도 위치에 자리를 잡았고, 그들이 나를 추천해줬던 거다. 그래서 그게 너무 기분 좋다. 여태까지 연극 해온 바탕 안에서 얻은 거니까.
하지만 언제가 될지 모르는 날을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꾸준히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지현준: 보이지 않는 것을 하는 사람이 배우고, 무대 위에서 보이지 않는 뒤의 삶이 중요한 게 배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힘들다. 그런 것들을 알게 되니까 술, 담배도 안하고 무슨 낙으로 사는지. (웃음) 이거 안 보이겠지만 몇 년 후엔 보여, 이런 재미로 가는데 거기까지 가려면 숨이 헐떡헐떡 찬다. 참 재미없게 살지만 그게 일상이고, 그동안 했던 것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하는데도 다시 들어가야 된다는 생각을 한켠에 하고 있다.
관객들이 멈춰서 자신을 돌아보길 바란다고 했는데, 무대 위의 배우도 그걸 느끼고 있나.
지현준: 2인극도, 게이도, 일상연기도 다 처음이었다. <댄스레슨>을 하면서 ‘배우로 살아가는 건 항상 버리고 새롭게 시작해야 되는 거구나’라는 걸 많이 느낀다. 매번 관객은 달라지고 어제와 똑같은 동작을 해도 똑같을 수가 없다. 연기하는 마이클 뿐 아니라 배우 지현준도 같이 가야 분명히 무대에서 효과가 있다. 그래서 잘 살려고 발버둥 치는 거다. 안 그러면 당장 무너졌을 거다. (웃음)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연기에 보일 때가 있다. 처음에 연희단 갔을 때 이윤택 선생님이 “너 이 새끼 그래서 안 되는 거야. 어떻게 살았는지 다 보여”라 하셨는데 그게 너무 창피했었다. 배우로서 사는 삶이 정말 무섭다. 여전히 나는 할 게 참 많다.
앞으로 더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무엇일까.
지현준: 지금 이렇게 계속 사는 것. 처음에는 새로운 걸 시작한다는 게 재밌었는데 이제는 그것을 계속 지속해야 하는 단계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무서운 힘이라는 걸 아니까 울면서도 하는 거다. (웃음) 지치지 않고 계속 새로워야 될 텐데. 그래서 항상 불편한 자리에 가져다 놓는다. 바이올린도 대기실에 가져다놓고 꼭 열어놓는다.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안 하니까. (웃음)
마지막으로 사소한 질문 하나. 유난히 스카프를 두른 사진이 많던데 지현준에게 스카프란? (웃음)
지현준: 아아아, 어떻게 알았지? 돈이 많지 않은 연극배우를 어느 정도 분위기 있게 커버해주는 최고의 패션 아이템? 으하하하하하. 그래서 웬만한 옷보다 스카프에 투자하는 게 더 많다. 하나만 걸쳐도 멋스럽고 뭔가 예술하는 사람 같은 폼도 나면서 (웃음) 더운데 왜 하고 있어? 라고 물으면 사실 멋 내려고 한 거지만 목이 좀 그래서, 라고 핑계도 댈 수 있으니까? 으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