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의 유령>에 등장하는 팬텀과 라울은 사랑의 방식도, 삶의 태도도 180도 다른 인물이다. 그리고 그 두 캐릭터를 맡은 양준모와 정상윤 역시 반대의 지점을 가진 배우들이다. 성악전공과 연기전공이라는 출신성분 외에도 양준모는 데뷔 후 주로 작품 속 강한 캐릭터로 기억되었고, 정상윤은 일상적 표현과 섬세한 디테일로 관객들에게 각인되었다. 이러한 그들의 차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묘한 긴장감을 만들어내고, 그 긴장감 속에서 톱니바퀴가 돌듯 서로의 장점은 극대화된다. 이미 2008년 뮤지컬 <씨왓아이워너씨>의 남편과 강도로 한 여자를 사이에 둔 경험을 나누었던 한 살 터울의 두 남자가 이번엔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팬텀과 라울로 새로운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중이다. 공연이 시작된 지 3개월, 제법 팬텀의 가면과 라울의 롱코트가 익숙해진 양준모와 정상윤을 만났다.
12월 19일이면 2009년의 <오페라의 유령>이 100회를 맞이한다.
양준모 : 작년에 (정)상윤이랑 같이 했었던 <씨왓아이워너씨>가 한 130회 정도 공연을 했는데, 연습기간까지 다 포함하면 사계절을 보낸 셈이었다. 보통 일반 공연들이 100회면 끝이 나는데, 이 작품은 내년 8월에 끝나는 일정이니 아직 많이 남았다. (웃음) 그래서 사실은 시작이라는 느낌이 더 많이 든다.
정상윤 : 100회라는데, 사실 별 느낌이 없다. 아직도 한참 멀어서.
한국어버전이 8년 만에 공연되는 만큼, 웬만한 뮤지컬배우들이 모두 오디션을 치뤘다고 들었다. 특히 공연소식이 들리기 시작하면서 이번 <오페라의 유령> 팬텀 역에는 양준모, 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그런 부분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나.
양준모 : 대체 그런 얘기는 누가 하는 건가. (웃음) 많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했다는데 나는 못들은 것 같다. 작품이 워낙 유명하기도 하고, 뮤지컬 쪽이 워낙 소문이 많은 집단이기도 해서 그냥 소문이겠거니 하고 있었다. 돼봐야 아는 거니까.
<오페라의 유령> 오디션을 보면서 양준모는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를, 정상윤은 <쓰릴 미>를 공연 중이었다. 공연과 오디션을 병행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나.
양준모 : 특별하게 어려운 건 없었다. 다만 심리적으로 계속 신경을 쓰고 항상 평소와는 다른 마음을 가지고 그 시간을 살았던 것 같다. 1차에 딱 떨어지고 나면 깔끔하게 집중할 수 있는데, 그 다음 것을 준비해야 되니까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보통 오디션이 길어봐야 2~3주면 끝나는데, <오페라의 유령>은 정말 징하게 했다.
정상윤 : 작품을 들어가면 회의도 하고 준비도 해야 하는데, 그 와중에 오디션도 봐야 했다. 그 기간 동안 공연을 해야 했기 때문에 혼란스럽기는 했던 것 같다. 공연 집중도 해야 하고, 이 역할에 대한 준비도 계속해야 되니까.
긴 오디션 끝에 팬텀과 라울이 되었다. <오페라의 유령>처럼 전 세계에서 오랜 기간 공연된 작품에 출연하기는 둘 다 처음이다. 연습은 어떤 식으로 진행이 되었나.
정상윤 : 여기서 안무 연습 끝나면, 위층 올라가서 노래 레슨 받고, 또 다른 방 가서 연기연습하고 하는 식이었다. 한꺼번에 모여서 회의하고 연기하는 대부분의 한국 뮤지컬 연습방식과는 달리, <오페라의 유령>은 나눠졌다가 합쳐지고 그랬다.
양준모 : 창작뮤지컬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까지 해왔던 작품들이 외국 라이선스 작품이라고 해도 국내초연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오페라의 유령>은 이미 전 세계에서 수십 년 동안 공연되었던 작품이라 그런지, 시스템이 대단했다. 편하고, 흥미롭고, 그러면서도 재밌었다.
체계적인 시스템에 반한 것 같다.
양준모 : 이런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게 굉장히 부러웠다. 처음에 외국 스태프들이 연습은 6주면 충분하다고 했다. 우린 도저히 불가능할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들 시스템으로는 딱 맞아들더라. 그리고 지금까지 여러 작품을 했지만 극장 리허설 하느라 진을 다 뺄 정도였던 건 <오페라의 유령>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한국의 많은 작품들에서 극장 리허설은 한 번 서거나, 더블일 경우에는 첫공연이 리허설일 경우도 있을 만큼 열악하다. 그런데 여기는 극장 리허설만 4주 이상을 하니, 무대에서 실수할 것 다 하고 고칠 것 다 고친 후 공연을 올릴 수 있었다. 오랫동안 공연을 해왔기 때문에 이런 시스템이 나올 수 있었을 것 같다. 이런 연습시스템이 우리나라에도 도입되면 좋겠다.
양준모는 공연 전부터 이미 ‘인간적인 팬텀’에 대한 의지를 표명했다. <오페라의 유령> 자체가 워낙 유명한 작품이다 보니 윤영석과 양준모, 각각의 팬텀에 대한 관객의 취향이 명확하다.
양준모 : 팬텀이 보여줄 수 있고, 관객들이 원하는 팬텀은 3가지다. 부드럽거나 카리스마가 있거나 기괴하거나. 그 중 한국관객들이 가장 원하는 건 카리스마 있는 강한 팬텀인 것 같다. <오페라의 유령>은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서 관객들이 어떤 성격의 팬텀을 처음으로 접했느냐에 따라 원하는 그림이 다르다. 그래서 두 번째로 볼 때 처음과 다르면 그 다름을 쉽게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다른 작품에서는 그런 호불호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반면, <오페라의 유령>은 그게 특징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해석한, 속은 너무 여리지만 겉으로는 굉장히 강한 척 하는 팬텀을 그리는 게 맞다. 캐릭터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처음-중간-끝의 팬텀이 각기 다를 것이다. 무대에서 배우는 게 배우니까 좋은 쪽으로 발전해야지.
팬텀은 감정의 진폭이 상당히 크다. 지하미궁신만 해도 크리스틴의 목소리에 취해 있다가 화를 냈다가 애원을 하는 등 감정이 널을 뛴다. 그리고 그 감정을 표현하는 것 중 웃음소리도 한몫을 하는데.
양준모 : 웃음소리를 크게 3가지 정도로 생각하긴 했는데, 매번 공연 때마다 다르다. 그 중 칼롯타를 비웃을 때, 그 웃음소리가 그나마 내 모습을 투영하는 것 같다. 웃음소리만으로도 캐릭터의 상태를 알아야 하는데, 난 개인적으로도 웃는 게 제일 힘들다. 눈물은 처음 감정만 잡으면 계속 나올 수 있지만, 웃음은 순간이기 때문에 그렇게 길게 가지 못한다. 연기 처음할 때 웃는 게 왜 힘든지 몰랐는데, 이젠 좀 알 것 같다.
여러 가지로 캐릭터를 해석할 여지가 많은 팬텀에 비해, 라울의 캐릭터는 전형적이다. 여주인공을 묵묵히 지켜봐주고, 보듬어주고, 그야말로 드라마 속 여주인공을 몰래 도와주는 ‘서브 남주’ 같은 느낌인데.
양준모 : 그래서 라울이 제일 어렵다.
정상윤 : 열심히 했습니다. (웃음) 라울 캐릭터를 구축할 때 제일 먼저 생각한 건 한 여자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었다. 그동안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여진 라울은 우유부단하고 여린 면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고 신념이 있으면 아무리 유약해도 강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좀 더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 면이 부각되기 위해서는 초반 드레스 룸에서 크리스틴을 처음 만나는 장면이 굉장히 중요하다. 거기서 모든 게 판가름 난다. 굉장히 짧은 신이지만, 거기서 크리스틴과의 관계가 명확하지 않으면 나중의 모든 일들에 대한 당위성이 얕아진다. 그래서 좀 더 장난스럽고 풋풋한, 어릴 적 친구를 만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두 사람 모두 크리스틴을 사랑하고 있다. 정반대의 성격만큼 그녀를 사랑하는 부분도 다를 텐데.
양준모 : 크리스틴은 완전 4차원이다. 내가 볼 때 <오페라의 유령>에서 제일 비정상적인 건 크리스틴인 것 같다. (웃음) 그런데 이건 나뿐 아니라, 크리스틴인 (최)현주도 외국 연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팬텀은 처음엔 대리만족을 위한 도구로 그녀를 이용하다가 지하미궁에서 크리스틴이 가면을 건네는 순간 사랑을 느끼는 것 같다. 이런 식의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으니까.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 그래서 팬텀이 굳이 크리스틴이 아니어도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이라면 사랑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양준모 : 그렇다면 마담 지리도 사랑했겠지. (웃음)
정상윤 : 크리스틴이 예쁘니까 그런 거다.
양준모 : 예뻤을까? (웃음) 개인적으로 이 이야기가 실재했다고 생각하는데, 크리스틴은 진짜 예뻤을까?
팬텀과 달리 라울은 어릴 적부터 그녀를 알아온 인물인데, 그렇다면 라울은 크리스틴의 어떤 면을 사랑할까.
정상윤 : 팬텀은 4차원인지 모르는 것 같지만, 라울은 이미 크리스틴의 4차원적인 모습도 알고 있다.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알고. (웃음) 하지만 그런 면이 또 매력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보호해주고 싶기도 하니까. 그런 여자들이 은근히 더 매력이 있기도 하지 않나.
양준모 : 하지만 결국 라울과 팬텀 모두 크리스틴의 진심을 봤기 때문에 사랑한 거겠지. 어쨌건 팬텀은 크리스틴에게 철저히 나쁜 남자여야 하고, 그에 비해 라울은 로맨틱한 남자여야 한다.
크리스틴은 나쁜 남자와 좋은 사람 사이에서 고민하는 여자의 심리를 대변하는 것 같다. 하지만 결국 크리스틴은 라울을 선택하지 않나.
양준모 : 크리스틴도 이제 지겨워진거지. (웃음) 맨날 얼굴 타령만 하고. 난 약해 약해, 받아줘 받아줘 하니까.
정상윤 : 그래도 내가 크리스틴이랑 나갈 때 얄미워하시는 분들도 있다. (웃음)
데뷔 이후 양준모는 지금까지 크게 쉬지 않고 작품들을 이어가고 있다. 올해는 연극 <아일랜드>부터 소극장 뮤지컬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 창작뮤지컬 <바람의 나라>, 그리고 대극장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까지 성격이 다른 작품을 계속 해왔다.
양준모 : 지금까지 해온 작품들이 형식상으로는 지정되지 않지만, 캐릭터는 좀 정해진다. 비인간적인 혹은 인간이 아닌 캐릭터들. (웃음) 다행스럽게도 데뷔하고 나서 계속 작품이 끊이지 않았다. 쉬지 않고 작품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 배우로서는 그게 행복인 것 같다. 특히 올 초에 끝났던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가 큰 계기가 되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내 나이보다 어린 역을 해봤었다. 초반에는 원래 부르던 노래 스타일도 아니었고, 캐릭터도 처음 접하는 인물이라 많이 힘들었다. 하지만 원캐스팅으로 300회 가까이 공연을 하면서 좀 더 내 자신이 가벼워졌달까, 그런 면을 느꼈다. 그리고 전공자라 해도 대사처럼 노래만으로 감정전달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거의 노래로만 진행되었던 작품이라서 노래로 감정을 전달하는 방법들을 많이 배웠던 것 같다.
반면 정상윤은 올해 <쓰릴 미>와 <오페라의 유령> 두 작품만을 하고 있다. 오히려 <쓰릴 미> 끝나고는 무대보다 객석에 더 자주 출몰하기도 했는데.
정상윤 : 사실 <쓰릴 미>가 5월에 끝났고 <오페라의 유령> 연습이 7월부터였으니, 사실 크게 쉬었던 것도 아니다. 그 타이밍에 공연을 할 수도 없어 일부러 여행도 가고 쉬었다. 나도 이쪽 일을 시작하면서 공연을 계속 해왔는데, <오페라의 유령>은 워낙 큰 작품이기도 하니까 스스로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뮤지컬 시장이 커지고 작품수도 워낙 많아지다 보니 배우들도 한해에 4~5 작품을 하는 배우들도 생겨나고 있다.
정상윤 : 작년에 <씨왓아이워너씨>와 <컴퍼니>가 살짝 맞물렸었다. 체력적으로 힘든 건 별로 없었지만, 나 자신 그리고 관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좀 있었다. <쓰릴 미> 하면서도 연극이 하나 들어왔었는데 약간 맞물리길래 거절했다. 그런데 그게 좋은 것 같다. 정말 욕심이 나고 부득이한 사정에 의해 공연을 할 수도 있겠지만 웬만하면 그러진 말자, 라는 주의다.
양준모 : 데뷔 초에 <꼭두별초>라는 작품을 안산에서 준비 중이었는데, 그때 <명성황후> 서울공연도 하고 있었다. <꼭두별초> 엔딩이 고음을 세게 내지르면서 끝나는 건데, 프레스콜 당일 그 장면을 연기하다가 기절해버렸다. 체력적으로 힘든 것도 있지만, 이제 좀 알고 나니까 겹치기는 할 게 못되더라. 둘 다 그런 것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올해 <오페라의 유령>으로 오래간만에 다시 만났다. 두 사람 다 윤영석, 홍광호와 더블캐스팅인데 그들에 비해 양준모, 정상윤이 가진 강점이 있다면.
양준모 : 선배님 장점이 훨씬 많다. 8년 전에 이미 한차례 <오페라의 유령>을 했고, 그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다. 넘을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연륜인데, 많은 것들을 경험하셨을테니 나와는 다를 거다. 내가 선배님 나이가 돼서 다시 하게 된다면 또 달라지겠지. 강점은 잘 모르겠다. 굳이 꼽자면 대극장에서 윤영석 선배님에 비해 내 얼굴은 더 잘 보이지 않을까? (웃음)
정상윤 : 강점이라, 글쎄.
양준모 : 기럭지다. 따라올 수 없는 기럭지. (웃음)
정상윤 : 공연할 때마다 최선을 다해 진실하게 하려고 노력한다. 관객들이 보면서 한 여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정말 멋지다, 라는 느낌이 들도록 자신 있게 하고 있다. 강점? 모르겠는데, 연습할 때도 외국 스태프들이 미스터 로맨스라고 하기는 하더라. (웃음)
초반에 말했듯, 공연시작 3달째이지만 이제 시작이다. 앞으로 내년 8월까지의 공연이 계속될 텐데, 1년 후 <오페라의 유령>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양준모 : <오페라의 유령>은 준비에만 1년, 공연이 1년 거의 2년이 넘는 시간을 투자하게 된다. 그래서 그동안 장기공연을 했던 모든 팬텀들에게 궁금한 것이 있었다. 매일의 공연을 똑같이 한다는 건 불가능하고 또 이렇게 감정의 진폭이 큰 캐릭터의 감정을 잡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 어떻게 별 탈 없이 할 수 있었나 하는 물음이었다. 다른 팬텀들에게는 물어볼 수 없었지만, 1년 공연이 끝나고 나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내가 얻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