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간 사랑받아온 한국의 넌버벌 퍼포먼스 (모닝캄 매거진)

세계 속에서 한국은 다양한 방식으로 소개된다. 외국인이 열광하는 한국의 아이템들은 시대가 변하며 조금씩 달라져왔지만, 넌버벌 퍼포먼스(non-verbal performance)만큼은 꾸준한 인기를 얻었다. 특정 언어가 없이 진행되는 공연인 만큼 넌버벌 퍼포먼스에는 나이와 성별, 인종과 문화를 넘어서는 힘이 있다.
<난타>, 20년 전 시작된 한국형 넌버벌 퍼포먼스
한국의 넌버벌 퍼포먼스는 1997년 <난타>로부터 시작된다. <난타>는 주방을 배경으로 칼과 도마, 각종 야채들이 만들어내는 하모니로 주목을 받았다. 프라이팬과 후추통, 주걱과 빗자루는 수시로 새로운 악기가 되어 다양한 리듬을 쏟아냈다. 사물놀이에서 차용한 리듬은 익숙하면서도 신선했고, 당시 처음 접한 넌버벌 퍼포먼스는 낯설지만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기에 더없이 좋았다. PMC프로덕션의 송승환 대표는 “관객들이 가만히 앉아서 보는 연극이 아니라 축구시합처럼 소리도 지르고 함께 뛰는 공연을 만들겠다는 시도”(<한국일보>)로부터 <난타>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한국의 전통연희는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판을 깔았다. 손닿는 곳에 연희자가 있었으니 무대와 객석의 경계는 옅었다. 장을 나누듯 다양한 장기가 이어지고, 그 중심에는 풍물이 있었다. <난타>는 넌버벌 퍼포먼스의 가능성을 전통연희에서 발견한다. <난타>는 가장 한국적인 것을 모던한 방식으로 풀어내 더욱 사랑을 받았다. 극 중 요리사들이 준비하는 것은 전통혼례용 음식이며, 객석에 있던 관객들이 무대에서 입는 것 역시 사모와 족두리다. <난타>는 전통적인 길놀이를 재현하듯 전 세계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는 냄비와 생수통을 이용해 오프닝을 한다. 흥겨운 타악 리듬은 ‘고추장’, ‘된장’, ‘김치’라 쓰인 통으로 연주된다. 익숙함과 낯섦이 공존하는 무대를 두고 <헤럴드>는 “엄숙한 오프닝에 속지 마라. 한국적이고 정적인 타악과 두루마기 차림, 그 뒤엔 해학 넘치는 음악적 영혼이 숨어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해외 시장을 염두에 두고 기획된 <난타>는 초연 이후 빠르게 해외의 관객을 찾아 나선다. 1998년 대만과 싱가포르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총 58개 나라 317개 도시에서 <난타>가 공연되었다. 1999년에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참여해 한국형 넌버벌 퍼포먼스의 가능성을 인정받았고, 2004년에는 뉴욕의 오프브로드웨이에서 10개월간 장기공연 되기도 했다. <난타>의 성공이 국내 넌버벌 퍼포먼스의 비약적 발전을 이끈 것은 당연했다. ‘난타’는 타악 퍼포먼스를 설명하는 보통명사가 됐고, <난타>의 타악 퍼포먼스를 변형한 작품이 다수 제작되기도 했다. 하지만 <난타>의 모조품일 수밖에 없던 몇몇 작품은 긴 생명을 얻지 못하고 결국 종연되었다.
새로운 소재와의 콜라보레이션
그때 등장한 것이 무술을 전면에 내세운 <점프>였다. 2002년에 시작된 <점프>의 구성은 넌버벌 퍼포먼스라는 장르 안에서 <난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관객과의 적극적인 소통이나 슬랩스틱 코미디는 장르의 법칙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프>는 태권도를 시작으로 택견과 우슈 같은 동양의 무술을 접목해 새로운 자극을 선보였다. 잘 트레이닝 된 배우들의 퍼포먼스는 관객의 기대를 뛰어넘었고, <난타>보다 더욱 정교하게 설계된 캐릭터는 슬랩스틱 이상의 코미디를 만들어냈다. 3년간의 <난타> 연출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 <점프>와 <비트>, <셰프>, <플라잉>을 무대에 올리며 한국형 넌버벌 퍼포먼스의 대표 크리에이터가 된 최철기 감독은 <점프>에서부터 캐릭터와 드라마를 보강해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에 집중했다고 말한다. 그 결과 <점프>는 <난타> 이후 한국형 넌버벌 퍼포먼스의 대표작이 된다.
이후로도 넌버벌 퍼포먼스의 성공에는 새로운 소재와의 결합이 필수가 되었다. 2004년에 초연된 <사랑하면 춤을 춰라>는 제목 그대로 ‘춤’에 집중한 작품이다. 재즈, 디스코, 힙합, 라틴댄스, 현대무용 등 다양한 장르의 춤이 쉴 새 없이 쏟아졌고, 춤은 캐릭터의 감정을 가장 솔직하게 전달하는 수단이었다.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2005)는 춤을 통한 진행이라는 점에서 <사랑하면 춤을 춰라>와 같았지만, 비보이와 발레에 집중함으로써 각 장르의 매력과 디테일을 부각했다. 가장 고전적인 발레와 현대적인 스트릿 댄스의 만남은 반전의 쾌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특히 2000년대 초반 세계대회를 석권한 한국 비보이 팀들이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한동안 스트릿 댄스와 결합한 <브레이크 아웃>, <쿵 페스티벌>과 같은 넌버벌 퍼포먼스들이 다수 제작되었다.
신체를 이용한 넌버벌 퍼포먼스는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2011년에 초연한 <플라잉>은 신라시대 화랑과 도깨비를 극에 녹여 경주에서 시작된 작품이다. 기계체조와 리듬체조, 치어리딩으로 무대를 꾸민 <플라잉>에는 실제 체조 선수들이 참여해 극한의 퍼포먼스로 화제를 모았다. <THE 태권포스>(2015) 역시 태권도를 소재로 한 다른 넌버벌 퍼포먼스와 달리 출연배우 모두를 실제 태권도 유단자로 채웠는데, 이들의 단수를 모두 합하면 공인 131단에 이른다. 소방관을 주인공으로 한 <파이어맨>도 2017년에 제작됐다. <파이어맨>은 어떤 상황 어느 곳에든 주저 없이 뛰어드는 소방관을 역동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파쿠르(parkour·다양한 장애물을 효과적으로 이용해 맨 몸으로 이동하는 스포츠)를 작품에 적용해 드라마와의 연결고리를 더욱 탄탄하게 만들었다. 극 중반 관객과 함께 심폐소생술을 배우는 장면은 넌버벌 퍼포먼스가 코미디 이상의 무엇을 남길 것인가에 대한 좋은 선례가 되기도 한다.
정적인 예술로 생각되기 쉬운 회화도 <드로잉쇼>(2008)와 <페인터즈 히어로>(2010)를 통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특히 이들 작품은 조명과 영상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순식간에 그린 수묵화 뒤로 파란 폭포가 흐르고, 거대한 명작의 채색이 완성되는 등의 무대 장치는 단순해 보일 수 있는 작품에 극적인 효과를 더했다. <드로잉쇼>는 마블링, 프로타주, 스탬핑 같은 다양한 회화 기법을 선보였고, 손과 빛을 이용해서도 그림을 그려낸다. 미술과 결합한 넌버벌 퍼포먼스들은 ‘그림을 그리는 과정’ 자체에 집중한 덕에 특별한 드라마 없이도 자기만의 영역을 확고히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20년 넘게 뮤지컬 음악감독으로 활동 중인 박칼린은 2017년에 <썬앤문>이라는 제목의 국악 넌버벌 퍼포먼스에 연출가로 참여한다. <썬앤문>은 소리에 집중한 넌버벌 퍼포먼스로 유명하다. 한국의 사계절은 풍경, 싸리 빗자루, 팥과 같은 한국적인 아이템이 만들어내는 소리로 구현되고, 애절한 선율로 기억되는 가야금과 아쟁은 EDM과 결합해 전혀 다른 감정을 끌어낸다. 모던한 스타일로 재탄생된 오고무 역시 <썬앤문>의 클라이맥스를 담당하며 국악의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특히 <썬앤문>은 대부분의 넌버벌 퍼포먼스가 남성 배우로 채워지는 것과 달리 12명의 배우 모두를 여성으로 선택해 여성이 갖는 다양한 장점을 무대에 펼쳐놓는다.
‘관광 공연’이라 불리는 넌버벌 퍼포먼스의 명암
현재 국내에서 만날 수 있는 넌버벌 퍼포먼스로는 <난타>, <점프>, <파이어맨>, <셰프>, <페인터즈 히어로>, <썬앤문>, <플라잉>이 있다. 그중 <난타>는 2015년에 누적 관객 수 1,000만 명을 넘기고 20년간 공연 중인데, 롱런에는 전용관의 역할이 컸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서울의 명동, 홍대, 충정로와 제주도, 태국의 방콕과 중국의 광저우에서도 <난타>가 매일 공연되었다. 신라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플라잉>과 <에밀레>는 시작단계부터 경주 관광과의 결합을 염두에 두고 제작되어 경주세계문화엑스포공원 내 문화센터에서 상시 공연 중이다. <페인터즈 히어로>와 <난타>는 제주도에서도 만날 수 있다. 특히 <난타>의 경우 2017년에 전용관과 이어지는 호텔 난타를 완공해 관극의 편의성을 높였다.
곳곳에 전용관이 생기고 하루에 적게는 2회부터 많게는 4회까지 공연된다고 해서 넌버벌 퍼포먼스의 미래가 마냥 밝은 것만은 아니다. 대부분의 넌버벌 퍼포먼스가 외국인 단체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까닭에 수시로 변화하는 국제정세는 공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지난해 <난타>는 정치·경제적 이유로 서울의 충정로와 중국의 광저우 전용관을 폐관했다. <점프> 역시 부산과 제주도의 전용관을 정리하고 현재는 서울 전용관만이 운영 중이다. 이후 <점프>는 국내에서 관광객을 기다리는 대신 크루즈 투어에 참여해 적극적으로 모객에 나섰다. 관객 개발과 더불어 넌버벌 퍼포먼스가 큰 변화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작품 자체로 승부를 보는 정공법이 필요하다. 최근 몇몇 작품들이 3D맵핑 기술이나 loT, 디지털 캐릭터 등의 무대 기술에 눈을 돌리는 것 역시 작품의 새로운 미장센을 위한 방책인 셈이다.
당연히 관객 개발과 작품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의 넌버벌 퍼포먼스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관점을 바꾸는 것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현재의 넌버벌 퍼포먼스가 관객과 소통하는 방법은 배우가 관객을 무대로 데려가는 일방적인 형태가 대부분이다. 최근 공연계의 흐름으로 떠오른 이머시브 시어터(immersive theater)는 여기서 더 나아가 관객이 배우를 쫓거나 극에 직접 참여하며 자신만의 공연을 만든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슬립 노 모어> 같은 이머시브 시어터 작품들은 오래 전 호텔이나 정신병동으로 사용되었던 건물 등을 개조해 극장으로 사용한다. 드라마에 맞춰 사실적으로 꾸며진 공간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캐릭터로 작용하고, 관객은 일반적이지 않은 형태의 극장을 누비며 새로운 자극을 경험한다. 게다가 이머시브 시어터는 연극은 물론 무용과 게임 등 다양한 형태의 창작물이 결합되기 좋고, 서로 다른 공간을 누빈다는 면에서 관광의 또 다른 방식이 되기도 한다. 고정적인 형태의 ‘극장’이라는 물성을 지워내고 ‘경험’이라는 행위에 집중한다면 넌버벌 퍼포먼스가 20년의 시간을 바탕 삼아 더 긴 역사를 쓸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