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 헌터’를 소재로 하는 뮤지컬 <블러디 사일런스>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서로 다른 세상을 살았던 이들은 뱀파이어 생제르맹이라는 공통의 키워드로 한 곳에 모인다. 갓 뱀파이어가 된 준홍과 뜨거운 심장을 가진 류진은 새로운 육체를 원하는 생제르맹의 피해자이며, 구마사제 헌식은 스승의 복수를 위해 그를 쫓는다. 우연히 만난 이들은 생제르맹이라는 공공의 적을 제거하기 위해 힘을 모은다. 작품에는 준홍이 왜 뱀파이어가 되었는지, 생제르맹은 왜 류진을 선택했는지, 헌식이 구마사제가 된 이유 같은 것들은 설명되지 않는다. 많은 설정과 상황은 ‘그렇다 치고’에 가깝다.
사실, 비일상적인 소재를 다룬 작품에서 설명은 무의미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익숙하지 않은 내용을 어떻게 납득시키느냐다. <블러디 사일런스>가 인물의 전사나 궁극적 목표보다 과정에 집중한 이유다. 뮤지컬은 ‘뱀파이어’라고 했을 때 쉽게 연상하는 것을 비트는 방식으로 관객과의 접점을 만든다. 불멸의 존재로 그려졌던 뱀파이어는 선짓국으로 생을 연명하는 존재이며, 하늘을 찌르는 거만함과 400년이라는 시간으로 무장한 ‘꼰대’에게는 예의 없는 태도가 승리의 요건이라는 식이다. 류진과 준홍은 서로에 대한 애정을 기반으로 생제르맹과 맞서고, 그들이 서로에게 반하는 과정은 하이틴 로맨스물의 전형성을 고스란히 따르며 웃음 포인트가 된다. 솔직해서 민망한 감정과 대사들이 무대에 넘실대고, 의도적으로 과장된 배우들의 표현이 부끄럽지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이어진다.
이를 구체적으로 담아내는 것이 음악이다. <블러디 사일런스>는 록을 베이스로 파이프 오르간과 하프시코드의 소리를 더해 음산하면서도 엄숙한 사운드로 시작된다. 그러나 이후의 곡들은 각자의 색을 분명하게 해 인물의 성격과 상황을 정확하게 짚어낸다. 만년 2등 류진의 자격지심은 두음법칙을 무시한 가사가 가득한 솔로곡으로, 게임에 등장할 법한 전자음이 인상적인 헌식의 곡은 사제의 이미지를 깨부순다. 뱀파이어가 되어서야 존재감을 얻은 준홍의 발라드와 생제르맹의 탱고도 마찬가지다. 모두에게는 어울리는 곡이 따로 있고,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진 솔로곡 안에서 인물들은 유치할지언정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나 좋아하지 마”,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같은 말이 음악 안에서는 가능해지는 것처럼.
그리고 엉뚱해 보이는 과정들이 모여 어떤 결과를 만들어낸다. <블러디 사일런스>의 주제는 ‘성장’에 닿아있다. 류진과 준홍, 헌식은 사회가 정상이라 부르는 기준에서 벗어난 인물들이다. 모두가 타인의 평가에 의해 무리에서 떨어졌지만, 이들은 그 우울함에 잠식되기보다는 일단 자신들에게 주어진 일을 해내며 각자의 특별한 재능을 찾아낸다. 류진 손에 들린 것은 공기총이 아닌 ‘피닉스 포포’이며, 헌식과 준홍 역시 희생으로 타인을 구해낸다. 물론 뮤지컬은 이러한 주제의식보다는 순간의 즐거움을 부각한 작품이다. 하지만 <블러디 사일런스>만의 색은 기존의 뮤지컬에서는 좀처럼 다루지 않았던 부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지나치게 무거운 색으로 가득했던 소극장 창작 뮤지컬 시장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