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 히어로의 등장, Like
영웅인가 독재자인가.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타이틀은 재정립되기 마련이다. 뮤지컬 <나폴레옹>은 정답을 내리는 대신 서로 다른 두 타이틀을 동등하게 무대에 올려놓고 관객이 직접 판단하도록 한다. 나폴레옹을 막연히 ‘프랑스의 영웅’정도로만 생각했던 관객들이라면, 자신의 신분 상승을 위해 대학살쯤은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그를 보고 당황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력만 있다면 누구나 명예를 누릴 수 있다” 같은 문장을 스스로 증명해낸 이의 삶을 눈으로 확인한다면 과연 관객은 나폴레옹을 비난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서사에서는 이처럼 논쟁적인 인물을 다룰 때 그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다양한 이유들을 안전망처럼 넓게 펼쳐둔다. 그러나 <나폴레옹>에서 그를 향한 변명은 극 초반 1~2신에 불과하다. 대신 작품은 나폴레옹을 통해 인간이 가진 권력을 향한 끝없는 욕망과 자신감을 넘어 오만함에 이르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동시에 보여준다. 새로운 안티히어로가 가는 길은 오로지 직진뿐이다. 특히 그의 존재감은 “날 비난하고 저주하고 경멸해봐. 당신들 날 잊을 수 없어”라 포효하는 ‘최후의 성전(The Last Crusade)’에서 극대화된다. 웅장하고 비장한 음악과 함께 세계지도 앞에 홀로 우뚝 선 나폴레옹은 온갖 화려함으로 무장한 대관식 때보다 더욱 빛난다.
표류하는 관극의 이유, Dislike
많은 라이선스 뮤지컬이 그렇지만, 문제는 나폴레옹의 일생을 2017년의 한국에서 왜 봐야 하는가에 있다. 관리들의 부패와 법 앞에서의 불평등은 지금의 이곳을 떠올리게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이 작품 탄생의 필연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혹여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 당시 프랑스의 사회상을 공연의 이유로 고집한다 하더라도, 나폴레옹 자체가 이 사회 변혁에 완벽한 선의를 갖지 않았으니 이 역시 100%의 이유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여기에 악처로 불리던 조세핀, 편인 듯 적인 듯한 탈레랑과의 관계까지 이어지면 이 의문은 점점 더 작품의 발목을 잡는다. 연인부터 가족, 동료에 이르기까지 나폴레옹을 둘러싸고 수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들은 3시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자신의 롤을 보여주기보다는 무대 위에서 표류한다. 널리 알려져 있으나 관객이 깊숙이 알기는 어려운 인물이나 시대, 장소를 중심에 둔 작품일수록 가장 보편의 감정을 포착해내고 기본에 충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새로운 안티히어로의 등장이 반갑지만, 무대를 구성하는 화려한 세트와 웅장한 음악들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