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너의 칼은 즐거웠다.”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 속 대원군의 충복 뇌전과 명성황후를 사랑한 무명은 서로의 목에 칼날을 세웠지만, 한복을 벗어던진 조승우와 최재웅은 사실 계원예고 동창이다. 고등학교 시절 돈키호테와 산초를 연기한 두 사람은 이후 같지만 다른 길을 걸어왔다. 영화로 대중적 인지도를 쌓아올린 조승우는 <지킬앤하이드> <맨 오브 라만차> 등 크고 굵직한 작품에, 최재웅은 <쓰릴 미> <어쌔신> 등 색깔이 분명하고 새로운 작품에 출연하며 서로의 영역을 다져나갔다. 그리고 두 사람은 몇 년의 세월이 흐른 뒤 한 스크린 안에 마주 섰고, 친구를 따라 ‘영화’라는 새로운 세상에 인도된 최재웅은 처음으로 작업한 작품을 통해 제 29회 영평상 남우신인상을 수상했다. 7년 간 무대에서도 탄탄한 입지를 쌓아올린 배우지만, 그 어떤 질문에도 과한 의미부여보다는 “그냥”이라는 답변을 내놓던 뮤지컬배우 최재웅을 만났다.
첫 영화인 <불꽃처럼 나비처럼>으로 제 29회 영평상 신인남우상을 수상했다.
최재웅 : 완전 민망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다른 신인이 없었기 때문에 받았다고 생각한다. (웃음)
뮤지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익숙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저 슴슴한 사람은 누구야?”라고 많이 궁금해 했을 것 같다. 영화는 어떻게 출연하게 되었나.
최재웅 : 영화사 대표님이 뮤지컬 <쓰릴 미>, <샤인>을 보시고 감독님에게 공연 한번 보시라고 권했다더라. 그런데 그 사이 (조)승우가 나를 추천했다. 감독님 입장에서는 나에 대해 궁금해 하던 차에 다른 배우가 또 추천을 하니 ‘얘는 뭔가’ 하셨을 것 같다. (웃음) 완전 운이 좋았다.
영화 작업을 해보니 어땠나. 영화 얘기를 물으면 극도로 부끄러워하고, 민망해하던데. (웃음)
최재웅 : 영화도 처음이었지만 사극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다. 상투를 틀었더니 눈이 양쪽으로 찢어지는 바람에 그 상태로 연기를 해야 했다. (웃음) 처음엔 정말 너무 어색해서 대사나 똑바로 하자, 라고만 생각했다. 무대야 객석 불이 꺼지고 나면 아무것도 안보이지만, 영화는 바로 코앞에서 카메라가 돌고, 수십 명이 지켜보고 있으니 뭐야, 싶었다. 가뜩이나 몰입도 잘 못하는데, 산만했었다. (웃음) 그래도 나중엔 익숙해지면서 괜찮아졌지만, 정말 영화는 집중력 뛰어난 배우들만이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나저나 나는 뭐 안 잘리고 나왔으니 다행이다.
현재 뮤지컬 <어쌔신>을 공연 중이다. 2005년 초연 이후 4년만인데, 초연 멤버 중 유일하게 같은 배역을 맡고 있다. 다시 작업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
최재웅 : 2005년 첫공연날 무대 뒤에서 까불다 넘어져서 코 안쪽이 깊숙하게 찢어졌었다. 밤에 응급실 가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진통제에 의지해서 전체 공연을 마쳤다. 이번 공연도 원래는 안하려고 했는데, 그 때 다친 상태로 했다는 점이 아쉬웠다. 제대로 못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다친 상태로 하다 보니 쉽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초연 멤버들이 많이 할 줄 알았는데 아무도 안하더라! 다들 배신 때려서 나만 남았다. (웃음)
엄기준, 오만석, 김무열 등 그때 당시에도 많은 팬을 거느린 배우들이 대거 참여했고, 2005년의 <어쌔신>은 한국에서 처음 공연되는 손드하임의 작품이기도 했다. 2005년의 공연은 어땠나.
최재웅 : 사실 초연 때는 공연 2주를 남기고 연출님이 중간에 관뒀었다. (웃음) 그래서 초연 때와 지금을 비교하자면 전체적인 균형과 조화는 지금이 낫다. 하지만 각 장면들의 에너지는 그때가 훨씬 컸던 것 같다. 연기하는 배우들의 나이도 지금보다 높았고, 그리고 워낙 센 형들이 많았다. (웃음) 농담처럼 말하지만, 연출이 따로 없다보니 배우들이 각자 살아남으려고 자기 신들에 대한 책임감이 컸었던 것 같다.
올해 공연에서는 뮤지컬배우 이경수와 함께 더블로 연기를 하고 있다. 두 사람이 표현하는 발라디어/오스왈드가 많이 달랐다. 이경수가 발랄한 느낌이었던 반면, 최재웅의 발라디어는 약간 빈정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최재웅 : 연습할 때만 해도 내가 (이)경수 같았다. 까불고. 내가 우울하게 생겨서 까불어도 잘 안 까부는 것처럼 보여서인지 공연 들어오고 나서 바꼈다. (웃음) 그리고 이 작품뿐 아니라 어떤 역을 맡더라도 특별히 캐릭터에 대해 잡고 하는 편은 아니다. 몰입을 잘 못해서 그 인물이 되어서 해야 된다, 그런 게 없다. 그냥 내 모습으로 한다. 애초에 배우기를 그렇게 배웠다. 그리고 요즘은 추세들이 다 그런 것 같다. 영화배우들도 연기하는 스타일은 같지만, 상황에 따라 캐릭터가 바뀌지 않나. 옛날에는 캐릭터들을 만들었는데, 요즘은 그냥 하려고 노력중이다.
스스로 미련 때문에 다시 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원래도 손드하임을 좋아한다고 들었다. <어쌔신>의 매력을 꼽자면 어떤 것이 있을까.
최재웅 : 원래 이렇게 드라마가 아닌 레뷔(뚜렷한 줄거리 대신 통일된 하나의 주제의식을 가진 장면들이 독립적으로 진행되는 극의 형식)를 좋아한다. 하나하나 깨고, 그것을 다시 쌓아가는 것. 손드하임의 <패션>이라는 작품을 가장 좋아했었는데, 이번에 하면서 이 작품을 가장 좋아하게 되었다. 정말 잘 쓴 것 같다. 최근에 뉴욕에 같이 간 번역가 (박)천휘 형 카드를 몰래 빌려서 도서관 가서 브로드웨이 영상을 보고 왔는데, 이게 이렇게나 재밌는 작품이구나 싶었다. 배우와 캐릭터 나이가 비슷한 것도 인상적이었고. 그런데 보다가 시간이 다 됐다고 해서 오스왈드 신만 못보고 왔다. (웃음)
많은 사람들이 뮤지컬이라고 했을 때 거대한 세트, 웅장한 음악, 기승전결이 뚜렷한 드라마, 화려하고 번쩍거리는 안무 등을 떠올린다. 하지만 <어쌔신>은 그런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 있는 작품이다.
최재웅 : 지금 무대에 올라가는 대부분의 작품들이 쉽거나 착하거나 뭔가 희망적인 내용의 극이 많다. 하지만 <어쌔신>은 레뷔 형식이다. 그 형식 자체를 예술로 이해하고 즐겼으면 좋겠다. 일반적인 기승전결이 있는 드라마 형식으로 생각한다면 정말 재미없는 작품이 될 것 같다. 뉴욕에서 본 영상에는 관객들이 한 장면 한 장면 끝날 때마다 커튼콜 같은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그들처럼 장면을 충분히 느끼고 반응한다면 마지막에 쌓이는 것이 있다.
이제 <어쌔신>이 며칠 남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이번 공연에는 얼마만큼 만족하고 있나?
최재웅 : 잘하고 있다. (웃음) 내가 생각했던 대로 잘 되가는 것 같다. 그렇다고 크게 오버하지도, 다른 걸 더해야 되는데 안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적당히 해나가고 있는 것 같다.
그동안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최재웅하면 <쓰릴 미>와 <어쌔신> 같은 작품을 떠올린다. 두 작품은 우울하고 음습한 특유의 분위기 외에도 기존 뮤지컬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작품이었다. 현재는 재공연을 하면서 많이 알려졌지만, 두 작품 모두 초연 때 참여했는데.
최재웅 : 최근에 승우랑도 얘기를 했는데, 계원예고 시절부터 연극과 뮤지컬을 계속 해와서 그런지 뻔한 건 못 보겠다. 눈에 불을 켜고 연기하는 모습을 어릴 때는 ‘와 멋있다’하면서 봤는데, 이제는 안 보게 된다. 그래서 좀 더 다양한 것들을 찾고 싶고, 새로운 것을 하고 싶다. 20대 때는 정말 들어오는 순으로 (웃음) 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좀 더 다양하고 특이한 소재들이 있는 작품을 하는 편인 것 같다. 그리고 그동안 <판타스틱스>를 제외한 밝은 작품들이 다 망했는데 (웃음) 착하고, 사람 안 죽이는 일상적인 소재의 작품도 해보고 싶다.
최근 무성영화 <청춘의 십자로>에도 참여해 뉴욕에 다녀왔다. 반응이 좋았다던데.
최재웅 : <청춘의 십자로>도 운이 좋았다. 그 팀의 작곡가와 음악감독님은 원래 알던 사이었다. <청춘의 십자로>는 한국영상자료원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연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작업했던 배우들이 스케줄이 안 맞아서 뉴욕에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아예 새로운 팀을 꾸리게 되었고, 거기에 나랑 뮤지컬배우 (조)정은이가 참여하게 되었다. 뉴욕에 한 일주일정도 있었는데, 그쪽 사람들은 변사를 처음 보니까 아주 그냥 난리가 났었다. (웃음)
예전과는 달리 크지는 않지만 다양한 시도들이 진행되고 있다. 무대 안과 밖, 스스로 생각하기에 어떤 점이 장점으로 부각되어 최재웅을 찾는다고 생각하나.
최재웅 : 작품의 이해도가 높다고 생각한다. 하하. 대사를 할 때 내가 알고 하는 거랑 모르고 하는 것이 다르지 않나. 2005년 <어쌔신>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소개되는 손드하임의 작품이라서 정말 공부를 많이 했었다. 그런 것들이 베이스로 쌓여서 이제 표현되고 있는 것 같다.
매번 ‘저평가된 배우’ 앙케이트 조사 결과가 꼬리표처럼 따라 다닌다. (웃음)
최재웅 : 늦게까지 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있지만,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은가 이런 것도 없다. 하지만 초반에 크게 인정받기 보다는 슬슬 주목받고 있는 것이 지금까지는 잘 왔다고 생각한다. 난 7년째 기대주다. (웃음) 그리고 그 투표는 아마 아는 사람들을 다 동원해서 한 걸꺼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