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가진 유일한 인생은 일상이다. 일상을 포기하면 인생도 망한다.” 하지만 어제와 오늘이, 오늘과 내일이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30년간 진행된 카프카 유작 반환 소송이라는 실제 사건에서 뮤지컬 <HOPE: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이하 <호프>)은 멈춰있는 인간에 주목한다. 무엇이 사람을 멈추게 하고, 또 무엇이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지.
에바 호프의 경우에는 다양한 상처가 그를 멈추게 했다. 어른의 보호를 받아야 할 어린 시절에는 도리어 엄마를 지켜야 했다. 유태인이었던 그는 전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를 배신하거나 적이었던 이들을 이용해야만 했다. 자신을 지옥에서 구해줄 신을 찾아 헤맸으며, 겨우 믿게 된 이로부터 배신을 당하기도 했다. 계속되는 추위와 가난 속에서 인간의 저항의지는 약해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모든 문제가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면 더더욱. 호프가 겪어낸 일들이 가혹했기에 그가 특별해보이지만,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 자기만의 벽을 쌓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다. 때문에 호프라는 한 개인에게서 발생하는 일이라도 그가 느끼는 감정이 디테일하게 묘사되면 될수록 오히려 보편성을 획득하는 셈이다.
<호프>의 전반부가 왜 30년간 멈출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라면, 후반부는 동력을 다시 찾는 과정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 발견되는 것은 인간의 두려움과 용기다. 호프는 끊임없이 자신을 자극하는 K의 말들에 자주 “나도 알아”라는 말을 한다. 자신의 현 상태는 호프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으며, 변화는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뮤지컬은 두려움과 용기라는 상반된 감정을 호프와 K로 분리해 시각적으로 표현해냄으로써 각각의 감정을 훨씬 더 구체적으로 담아내 실체를 확인하도록 돕는다. 특히 호프의 일대기를 과거 회상의 형태가 아닌 현재의 호프가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표현된다는 것은 중요하다. 어떤 문제든 밀쳐두었던 것을 다시 꺼내어 그때의 감정들을 바라보고 확인하는 과정이 있고서야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호프는 상처로 가득한 과거의 자신을 마주하는 것이 버거워도 자리를 뜨지 않고 주위를 맴돈다. 그런 호프를 통해 <호프>는 희망을 발견하고 그로 인해 변화하는 인물을 보여준다.
그리고 작품은 지금의 삶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한 호프를 다양한 요소로 응원한다. 인물을 감싸 안는 듯 한 완만한 타원 형태의 무대에는 나무의 결을 살린 세트가 있고, 그 위로 따뜻한 색감의 조명이 떨어진다. 기타와 바이올린, 첼로 등의 악기가 만들어내는 화음은 서정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그 자체로도 호프를 위한 연대의 정서가 된다. 각각의 넘버들은 다양하게 변주되어 적재적소에서 감정을 이끌어내고, 무반주로 노래되는 단 몇 소절의 가사는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적확하게 그동안 제 목소리를 내지 않았던 인물의 처지를 반영한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변화를 꿈꾸는 이를 응원한다. 78세가 되어도 늦지 않았다는 메시지가 위로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가장 개인적인 작품이지만, 결국 <호프>가 모두의 이야기로 치환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