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이루마 (삼성엔유)

한 남자가 피아노로 향합니다. 남자는 셔츠를 아무렇게나 둥둥 걷고 의자의 높이를 조절합니다. 건반 위에서 깃털 같은 손가락이 짧은 심호흡을 신호 삼아 날아오릅니다. 어디에도 악보는 없습니다. 곡명도 딱히 없습니다. 그저 지금 이 장소의 공기에 손가락을 내어줄 뿐입니다. 이 남자의 이름은 이루마입니다.
우아한 곡선과 정갈한 건반, 현악기의 섬세함과 타악기의 공명, 7옥타브의 광활함과 화려함.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동시에 홀로 고고할 수 있는 완전체. 피아노는 아름답고 완벽하고 필연적으로 외롭다. 이루마는 그런 피아노를 썩 닮았다. 한번쯤 돌아볼 법한 외모와 나른한 듯 미소 짓게 하는 서정적인 음악은 아름답고 완벽하다. 하지만 그의 연주음악에는 어딘지 모르게 물기가 느껴진다. 애잔하다는 표현으로도 좋겠다. “클래식을 전공했지만 어릴 때 누나들 덕분에 가요를 쉽게 접했어요. 누나들이 듣던 카세트테이프를 그대로 물려받을 정도였으니까요. 시인과 촌장, 여행스케치, 동물원, 이문세 등등. 故 이영훈 선생님의 곡을 특히 좋아했죠. 서정적인 가사뿐만 아니라 멜로디가 너무 좋았어요. 그때의 기억들이 무의식 중에 제 음악에 영향을 미친 것 아닐까요.”
음악으로 쓰는 일기
‘연주음악’이라는 장르가 낯설었던 2001년, 새로운 듯 익숙한 이루마의 음악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드라마와 CF, 다양한 공간에서 그의 음악이 “공기”처럼 흘러나왔고, 이후 그와 같은 결과물을 내어놓는 아티스트들이 부쩍 많아졌다. 그의 음악을 어떤 이들은 “이지 리스닝”이라고 혹은 대부분의 곡이 비슷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듣는 이들의 제각기 다른 추억을 떠오르게 한다는 점에서 이루마의 음악은 독특했고, 하나의 물줄기가 되어 10여년의 세월을 흘렀다. “저에게 음악은 일기예요. 작년에 발매한 7집 <기억에 머무르다>는 3일간 홀 하나를 빌려서 생각나는 대로 연주하고 작곡했어요. 그때 그때를 기록하는거죠.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작곡의도 같은 제 이야기가 아니에요. 저는 그저 청자들을 위한 여백을 만들고, 듣는 이들의 상상으로 음악을 완성하고 싶어요. 당신의 생각과 추억, 기억들이 이 음악과 묻어갔으면 하는 그런 바람이죠.” 무언가를 강요하지 않는 이루마에게는 아티스트라 이름 붙여진 이들이 가진 특유의 자만심이 없다.
한동안 겪은 아픔 때문일지도 모른다. 2010년 전 소속사와 벌인 일련의 소송은 음악밖에 모르던 순수했던 시절로의 회귀를 갈망했다. “할 줄 아는 게 음악밖에 없어요. 스트레스를 주는 것도, 저를 치유할 수 있는 것도 음악뿐이죠. 그게 늘 일치해서 괴롭기도 하지만 그래서 그때도 오히려 음악을 더 찾아들었어요. 음악을 듣고 혼자 상상하는 그 시간들이 좋았고, 영화 엔딩 크레딧에 흐르는 음악이 얼마나 좋은지 깨닫는 시간이 되기도 했어요.” 무엇인가를 잃었을 때 비로소 사람들은 그 흘러간 시간을 각성한다. 일부로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자신의 전부였는지를, 깊은 내면에 오랫동안 잠들어있던 진짜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를 말이다. “연주음악을 11년 했지만, 지금보다 1집 때가 피아노 터치나 음악에 깊이가 있었어요. 당시 녹음실에 처음 들어섰는데 텅 빈 공간에 우두커니 있던 피아노가 너무 두려웠어요. 잘해낼 수 있을까. 그때 앨범을 다시 들으면 마냥 슬퍼요. 두려움이 많이 느껴지고 연주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고 계속 떨리는데 뭔가가 있더라구요. 설렘과 두려움. 그 마음으로 다시 시작이라 생각했죠.” 그리고 첫사랑을 다시 찾듯 이루마는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대중가요작곡이라는 새로운 길에 성큼 들어섰다.
외로운 길의 끝에서 만난 또 다른 나
“클래식을 전공했지만, 대중음악에 대한 편견도 없었고 오래전부터 오히려 하고 싶었어요. 게다가 피아노 한 대로만 이루어진 연주음악을 줄곧 해왔는데, 스케일 큰 음악을 들을 때마다 오케스트레이션 하고 싶다는 욕심도 많았구요. (웃음)” 최근 이루마는 작곡가 2Face와 함께 ‘마인드 테일러’(Mind Tailor)라는 대중음악창작팀을 꾸려, 백지영의 ‘싫다’와 2AM의 ‘내게로 온다’를 선보였다. 이루마라는 이름을 애써 찾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두 곡에서 그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제 이름 대신 가수 뒤를 든든히 받치는 조력자의 이름을 선택한 것이다. “마인드 테일러라는 이름은 맞춤양복처럼 가창자의 마음을 읽고 듣는 사람도 공감할 수 있는 딱 맞는 음악을 선물한다는 의미로 지은 거예요.” 이름처럼 ‘싫다’는 백지영의 애절한 흉성을 살렸고, ‘내게로 온다’는 록적인 색이 가미된 2AM의 발라드로 태어났다. “요즘은 작곡가들도 본인의 시그니처를 곡에 담지만, 저는 제 색이 짙게 들어가는 것은 원치 않아요. 대신 피아노 톤을 계속 다르게 가져가는 걸 생각하면서 편곡을 하는 편이에요. ‘싫다’에서는 피아노 소리를 거꾸로 돌리는 리버스 피아노를 사용했고, ‘내게로 온다’는 록피아노 같은 소리를 내려고 했어요. 굳이 시그니처를 찾으라면 그 피아노 소리겠죠.”
외로웠던 개인작업은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외로웠던 피아노는 다른 악기들과의 만남으로 이어지며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다. “재밌어요. 매번 음악을 혼자서만 만들다가 여러 사람들이 함께하니 뭔가 새로운 것들이 나오더라구요. 저도 그 작업에 참여하면서 많은 것들을 배우고 있어요. 하지만 창작은 매너리즘과의 싸움인 것 같아요. 예전엔 안 나오는 걸 알면서도 죽치고 앉아있을 때가 있었거든요. (웃음) 이젠 음악도 듣지 않고 생각을 비우는 시간을 가져요. 제가 부자연스러우면 들으시는 분들도 분명히 느끼시거든요.” 새로운 길은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게 했고, 그 발견은 새로운 시선으로 이어진다.
모든 것이 통하는 단 하나의 길, 음악
대중음악 작곡이 그러하듯 하나에 빠지면 계속 파고드는 이루마의 호기심 강한 성격은 최근 음악 외적인 영역으로까지 부쩍 늘어났다. 그리고 모든 것의 기준은 당연하게도 음악이다. 더 좋은 음악을 만들기 위한 더 좋은 삶. “2008년 <세상의 모든 음악> DJ를 하면서 덜 알려진 음악을 접하며 음악공부를 했다면, 지금 하고 있는 <골든디스크>는 청취자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인생의 간접경험을 하고 있어요. (웃음)” 이루마는 부족한 것 없이 하고 싶었던 것을 할 수 있었던 어린 시절과 이르게 맛본 성공이 자신의 아킬레스건임을 정확히 안다. “라디오는 다양한 분들이 듣는 매체인데 그 누구도 소외받는 느낌을 주고 싶지 않거든요. 하지만 전 사실 평탄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많은 것들이 조심스럽고, 경험이 부족해서 깊이 파고들지 못할 때가 많아요. 대신 그럴때면 솔직하게 털어놓고 경험하려고 애쓰는 편이에요.”
작은 지방 소도시까지 직접 찾아가 공연을 하고, 유난히 병원과 학교 등 자선콘서트에 자주 등장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음악이 가진 치유의 힘을 믿는다. “음악이 물질적인 도움이 안 될지 몰라도, 심리적으로 굉장한 도움이 되거든요. 그래서 자선공연은 더욱 필요하죠. 공연을 접하고 싶지만 물리적으로 어려우신 분들께 직접 찾아가고 있어요. 가능하면 무료로, 일정한 금액을 받더라도 기부의 형태로 돌려드리구요.” 그의 나눔 실천은 음악밖에 모르던 어느날 우연히 시작하게 된 유아용품 사업으로도 이어졌다. “음악과 사업을 접목시켜 사회 환원을 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야지 또 마음이 편해져서 더 좋은 음악을 쓸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최근 그는 미혼모들의 자립을 위한 공간을 마련했다. “따뜻함을 가진 기업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요즘 대기업에서도 다양한 사회공헌 프로젝트들이 많잖아요. 받은만큼 돌려줘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유아용품이니 미혼모 시설을 알아보게 됐고, 시작은 겸사겸사였지만 지속가능한 일을 지원해주고 싶었어요.” 결국 음악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어떤 삶을 꾸려나가느냐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가정을 꾸리며 부쩍 더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음악작업에 참여하는 그는 여전히 꿈꾼다. “제 음악이 항상 어디서든 나왔으면 좋겠어요. 최대한 살아있을 때 많이 쓰려구요. (웃음)” 이루마의 음악으로 가득한 세상이라니. 1년 365일이 꽃피는 봄처럼 마냥 따스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