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유산을 향한 존경, Like
신생제작사였던 HJ컬쳐는 주관사로 참여했던 뮤지컬 <셜록 홈즈>를 시작으로, 2013년 본격적으로 아티스트의 고독한 내면에 집중한 <빈센트 반 고흐>, <살리에르>, <파리넬리>를 제작하며 5년 만에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한 제작사로 성장했다. <라흐마니노프>를 준비 중이던 김유현 작가와 김보람 작곡가가 HJ컬쳐를 찾아온 것도, 이러한 결과의 덕이 크다. 특히 HJ컬쳐는 영상을 통해 고흐의 작품을 무대로 불러오고(<빈센트 반 고흐>), 다수의 배우를 무대에 세워 목소리가 가진 힘 자체에 집중하는(<파리넬리>) 등 아티스트들의 유산을 무대에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라흐마니노프> 역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라흐마니노프의 흔적을 작품 곳곳에 심어두었다. 이진욱 작곡가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과 ‘교향곡 1번’을 비롯해, 그의 음악에서 자주 등장하는 종소리 모티브 등을 17개의 넘버에 촘촘히 담았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이진욱 작곡가의 편곡을 거쳐 인정에의 욕망과 열등감, 완벽에의 강박과 죄책감에 사로잡힌 인물의 감정을 더욱 증폭해 피아노와 현악 6중주의 라이브 선율로 연주된다. 음악 위로 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가사가 더해지자 관객은 거대한 천재 예술가가 아닌, 고통을 이기려 애쓰는 한 인간을 자연스럽게 만나게 됐다. 여기에 예술가를 다루는 많은 콘텐츠가 이들의 전 생애를 조망하는 연대기적인 방식을 택하는 것에 반해, <라흐마니노프>는 ‘교향곡 1번’의 실패 이후 극심한 슬럼프를 경험하고 ‘피아노 협주곡 2번’으로 극복하는 3년을 다루며 집중도를 높였다. 선택과 집중의 정석.
위트에의 강박, Dislike
2인극, 유명하더라도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법한 클래식, 신경쇠약과 우울증이라는 주인공의 어두운 상황을 고려한다면, 관객이 <라흐마니노프>에 대해 ‘재미없다’는 인상을 가질 위험이 있다. 아마도 작가와 연출가는 이것을 우려해 니콜라이 달의 캐릭터를 재해석 했을 가능성이 있다. 자신의 상황을 견디다 못해 정신의학자 니콜라이를 찾아간 실제 라흐마니노프에 비해, <라흐마니노프>는 니콜라이를 좌절한 예술가를 향해 꾸준히 러브콜을 보낸 인물로 그린다. 시작점이 달라지자, 니콜라이는 마음의 문을 닫은 라흐마니노프 곁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그의 주위를 환기하는 행동을 한다. 그것은 터무니없는 비올라 연주이기도 하고, 실없는 농담이거나, 꾸준한 관찰이기도 하다. 라흐마니노프를 향한 니콜라이의 행위들이 쌓이며 둘 사이의 벽은 균열을 내고, 기어코 라흐마니노프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직면하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라흐마니노프의 슬럼프 탈출이 실제와 다소 다르다 하더라도, 관객은 뮤지컬을 통해 라흐마니노프가 니콜라이에게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헌정한 이유에 공감할 수 있다. 다만, 라흐마니노프의 반대편에 선 듯 보이는 니콜라이의 성격에서 작품은 종종 위트에의 강박을 드러내는 것도 사실이다. 라흐마니노프의 상황과는 별개로 등장하는 니콜라이의 농담들에는 다소 맥이 빠지고, 티격태격하는 둘의 모습이 때로는 당혹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특히 희회화 된 차이콥스키에 대한 설정은 자칫 오해의 소지가 될 수 있어 아쉬움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