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을 지탱하게 하는 시의 힘, Like
부모의 죽음, 전쟁, 감시, 가난, 납치, 살인. 유리 지바고가 짧은 생애 동안 경험한 일은 그 고통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잔혹하다. <닥터 지바고>가 전쟁과 혁명으로 얼룩진 격변의 러시아를 살아낸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기 때문이다. 의사였던 유리는 필연적으로 생사의 경계, 혼돈의 정세 속에서 가장 많이 이용되는 위치에 있었다. 욕망과 공포가 뒤섞인 라라의 고난 역시 가난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혁명의 중심에 섰으나 악마가 되어버린 파샤도 부조리한 세상을 향한 분노를 동력으로 움직인다. 가장 비열한 기회주의자였던 코마로프스키마저 시대가 키워낸 인물이었다. <닥터 지바고>는 그럼에도 생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을 통해 끝내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들을 강조한다. 그것은 인간을 향한 경외이기도 하고, 생을 지탱하게 만드는 예술이기도 하다. 뮤지컬 <닥터 지바고>는 자유와 아름다움을 향한 갈망으로 쓴 유리의 시를 그 중심에 둔다. “마음의 소리를 담는” 시는 감정을 음악에 실어 표현하는 ‘뮤지컬’이라는 장르와 닮았다. 극이 진행되는 동안 유리는 심심할 정도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넘버를 통해 “난 왜 살아남고 저들은 떠났는” 지 고민하고, “하얀 재처럼 허무한 눈물처럼 사라지지 않으리라”고 다짐한다. 방대한 서사 속에서 휘발되기 쉬운 사랑 역시 아름답고 섬세한 언어로 직조된 가사 덕에 찬란하게 빛난다. 전쟁 속에서도 음악은 오히려 더 우아하고, 엄혹한 시대에서도 이들은 민요를 부르며 결혼을 하고 씨를 뿌리며 밭을 일군다. <닥터 지바고>에는 생의 의지로 가득하다. 그리고 작품은 모진 삶을 지탱하는 힘이 예술에 있음을 뮤지컬로 증명한다.
배우가 감당해야 할 무게, Dislike
<닥터 지바고>에서 관객의 눈길을 가장 먼저 사로잡는 것은 무대를 완만한 곡선으로 둘러싼 LED다. 여기에는 음울한 모스크바의 하늘과 설원을 달리는 기차,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의 한복판이 교차되며 담긴다. 거대한 LED를 전면에 배치하는 대신 세트는 최소화됐다. 테이블과 몇 개의 의자가 서로 다른 공간을, 얼어붙은 창문 오브제와 나부끼는 눈이 계절을 그린다. <닥터 지바고>의 무대는 광활하고 황폐한 시대와 공간 안에서 인간이 느끼는 나약함을 표현하기 위한 과감한 연출인 셈이다. 군더더기 없는 무대가 깔끔하게 제 역할을 하지만, 그 안에 선 인간을 표현하는 것은 오롯이 배우의 몫이 됐다. 특히 시인인 유리는 자신의 감정을 말보다 음악에 싣는다. 그러나 음악의 아름다움과는 별개로 유리의 곡들은 감정을 폭발하는 형태로 작곡되지 않았다. 그 흔한 박수갈채를 받는 곡도 드물다. 고음보다는 중저음이 도드라지며 잔잔하게 전개되고, 내면에 집중한 가사가 다수를 이룬다. 방대한 서사 탓에 인물의 세세한 감정이 대사로 설명되기도 어렵다. 물론 이 자체가 <닥터 지바고>의 매력이다. 하지만 2시간 30분간 관객의 집중과 상상력을 붙잡아두는 것은 10년 이상 경력의 베테랑 배우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 아니다. ‘뮤지컬배우’로서의 능력을 평가받는 시험대에서 살아남는 이는 누가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