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심하게 섬세한, Like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아스라함을 무대에 충실히 구현해낸 박천휴-윌 애런슨 콤비의 작품답게 <어쩌면 해피엔딩> 역시 아날로그의 따스함으로 가득하다. 여기에 김동연 연출은 창작자들의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애착”(윌 애런슨)을 음악과 음향, 소품과 조명 등을 통해 구체화한다. 첼로의 묵직한 저음부터 감정의 클라이맥스를 만드는 바이올린, 둘 사이를 잇는 비올라와 튀지 않게 리듬감을 부여하는 드럼, 청명한 피아노까지 6인조 어쿠스틱 편성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작품의 빈 곳을 풍성하게 채우고 인물의 감정을 증폭한다. 그리움을 표현하듯 음향은 저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재즈 선율과 LP의 지지직거리는 소음을 재현하고, 파스텔 톤의 의상과 실 전화, 종이 잡지, 낡은 병 같은 소품 역시 <어쩌면 해피엔딩>을 감성적이고 따뜻한 작품으로 만드는 것에 힘을 보탠다. 버전에 따라 두 사람의 상태가 조금씩 다르거나, “팔·다리가 저릴 일이 없으니” 오랫동안 서로에게 기대어도 된다는 대사 등을 통해 드러나는 낯선 설정은 익숙한 형태의 공간 안에서 오히려 극에 활력을 주고, 생각보다 캐릭터를 더 입체적으로 만든다. 특히 “빛바랜 벽에 스며들던 따스한 햇살 / 조용한 오후 평온한 외로움을 나누던 우리 둘”(‘Goodbye, My Room’)처럼 모호하지만 누구나 느껴봤음직한 감정을 단정하게 형상화하거나, “날아가지마 내 곁에서 / 달아나지마 내 품에서”(‘반딧불이에게’)처럼 반복과 라임으로 강조하는 가사는 <어쩌면 해피엔딩>을 ‘가까운 미래 로봇들의 사랑’이라는 낯선 설정보다는 ‘우리는 왜 사랑하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좋은 답의 도출로 이어진다. 감정을 다루는 작품이 얼마만큼, 어떻게 세심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
환희를 다 담아내지 못한 반딧불이, Dislike
“유령의 집”과 같던 서울의 아파트를 벗어나 친구와 반딧불이를 찾아 제주로 떠나는 올리버와 클레어의 이야기는 사실 로드무비에 가깝다. 그들은 길 위에서 자신들의 과거를 나누고, 현재를 고민하고, 미래를 꿈꾼다. 관계를 믿는 올리버와 관계에 냉소를 느끼는 클레어가 서로를 궁금해 하고, 자신이 세운 기준 밖의 어떤 것을 인정하며, 결국 사랑에 빠지는 것 역시,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부터다. 공간변화가 많은 작품의 경우, 대부분의 무대 장르가 그러하듯 한정된 세트를 움직이고 영상을 투영하는 것으로 공간의 한계에 도전한다. <어쩌면 해피엔딩> 역시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고 작품의 비중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영상의 활용은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제주도의 한 숲에서 반딧불이를 만나는 신은 내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누군가를 돕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던 헬퍼봇들이 스스로 빛을 내는 반딧불이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필연적이고, 반딧불이는 정반대의 두 사람을 잇는 강력한 상징이 된다. 부족한 공간에 대한 감각을 되살리기 위해 음악은 풍성하게 연주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세하게 반짝이는 영상만으로는 순간의 환희를 다 담아내기에 부족함이 많다. <김종욱 찾기>나 <내 마음의 풍금>이 구현해낸 작은 별들을 떠올리고, ‘아날로그’를 작품의 큰 매력으로 여긴다면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