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은 이해의 영역이 아니다. 다수의 상징에서 공감의 영역을 찾아내지만, 논리적 이해가 꼭 뒷받침되는 것은 아니다. 아더 왕의 전설을 다룬 뮤지컬 <엑스칼리버>도 그렇다. ‘엑스칼리버를 뽑은 자가 왕이 된다’는 명제, 드래곤과 흑마법 같은 설정, 범죄에 가까운 출생의 비밀과 금지된 사랑이라는 서사. <엑스칼리버>는 상대적으로 아더왕의 전설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 관객을 위해 캐릭터에 집중한 연출을 시도한다.
어떤 아더왕의 이야기에서든 아더와 랜슬럿, 모르가나와 멀린, 기네비어의 존재는 기본값이다. <엑스칼리버>는 이들 캐릭터에 명확한 감정적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단계별로 전달하는 것에 모든 힘을 쏟는다.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아더는 “절대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을 노래하고, 스스로의 선택보다는 예언에 의해 왕이 되는 과정에 정체성의 혼란을 담아낸다. 오랫동안 아더를 지켜온 인물로 설정된 랜슬럿, 존재가 지워진 채 살아온 모르가나는 각자의 방식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려 애쓴다. 아더와 모르가나의 삶에 관여해온 멀린에게서는 죄책감이, 기네비어에게서는 주체적인 삶 안에서도 계속되는 외로움이 발견된다. 각각의 인물들이 담당한 명확한 감정과 설명보다는 묘사 위주의 한국어 가사가 낯선 설정 속에서도 관객의 공감대를 형성하도록 돕는다.
특히 도드라지는 것은 캐릭터의 감정을 충실히 담아냄으로써 서사를 견인하는 연출력이다. 연출가 스티븐 레인은 대본이 모두 담아낼 수 없는 정서의 흐름을 무대 위 다양한 요소로 구현해낸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는 뮤지컬을 공연하기에는 다소 넓다. 스티븐 레인은 70여 명의 앙상블을 무대 곳곳에 촘촘히 정렬하고, 각자에게 명확한 롤을 부여함으로써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이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은 전쟁으로 희생되는 백성의 삶과 색슨족의 원시성을 그린다. 아더에게 닥친 상황이 구체적으로 재현될수록 감정 변화에 힘이 실리고, 공감의 영역은 넓어지게 마련이다. 그림자로 살아온 랜슬럿의 마음은 세트와 조명을 이용해 우거진 숲을 비추는 달빛으로, 흑마법을 소환해서라도 자신을 찾고 싶은 모르가나는 신비로운 선율로 표현된다. 암전을 최소화하고 관객이 인물에게 집중하는 동안 순식간에 전환되는 장면들은 인물의 정서와 서사의 호흡을 끊지 않고 부드럽게 이어낸다. 이 모든 것은 몇몇 개의 거창한 무대 장치나 혁신적인 기술보다는 무대 요소들이 클래식한 방식의 유기적인 합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물론, 불길한 까마귀 울음소리나 가죽·타투로 표현되는 원시성 등은 클리셰에 가깝다. 2막은 1막의 호흡에 비해 느슨하고, 구현되지 못한 장면도 감정이 설익은 캐릭터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클리셰가 어떻게 서사와 결합해 관객을 설득하고 단점을 잘 감추느냐에 있다. <엑스칼리버>는 시·청각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정서를 담아낸 장면을 만들어냄으로써 이것이 소설이나 음악이 아닌, 무대예술인 이유를 증명해낸다. 연출가의 역할과 범위, 능력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