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리한 재창작, Like
뮤지컬 <붉은 정원>을 보고 원작 소설 <첫사랑>을 찾아본 이들이라면 당황할 것이다. 뮤지컬은 원작의 설정만을 가져와 거의 새로 썼기 때문이다. 원작은 처음으로 사랑을 하게 된 소년 블리자미르의 기쁨과 질투, 불안이 뒤섞인 감정의 결을 촘촘하게 그린다. 하지만 1인칭 시점으로 쓰인 만큼 때때로 감정은 극단을 오가고, 자신이 사랑하는 이임에도 지나이다를 ‘남자를 가지고 노는 여자’로 묘사하거나 지나이다가 사랑하는 이는 실체와 상관없이 ‘연적’으로만 분류한다. 뮤지컬은 이반, 지나, 빅토르라는 인물의 시점으로 사건을 재해석하며 원작의 한계를 돌파한다. 크지 않은 무대에서 스치듯 엇갈리는 배우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호기심을 유발하고, 상대의 마음을 정확히 알 수 없어 생긴 공백에는 극이 진행되며 다른 시선의 이야기가 차곡차곡 더해져 풍성해진다. 클래식한 음악 역시 같은 멜로디에 서로 다른 가사를 부르거나, 같은 가사를 노래하더라도 서로 다른 감정의 뉘앙스를 담아내며 이 작품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붉은 정원>은 ‘엇갈림’이라는 안타까운 감정을 서사와 음악, 동선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셈이다. 특히 세 사람의 감정에 집중하도록 설계된 구조는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법한 사랑을 관객이 사랑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돕는다. 몰락한 가문의 재건을 위해 소비되던 지나가 제 삶을 향해 움직이라는 빅토르의 말에 반응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책임’이라는 굴레에서 살아가던 빅토르가 자신의 의도를 유일하게 알아봐준 지나에게 이끌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결과보다는 결과에 이르는 과정 그 자체를 섬세하게 집중한 뮤지컬.
제4의 캐릭터가 되지 못한 정원, Dislike
이 작품의 제목은 ‘첫사랑’이 아닌 ‘붉은 정원’이다. 그만큼 정원은 뮤지컬에서 제4의 인물과 다름이 없다. 정원에서 셋은 만나고 감정을 나누고 헤어지며, 정원의 장미는 더 많은 매개로 사용된다. 지나는 유일하게 가시 있는 장미를 들고 온 이반을 주목하고, 지나 앞에서 수줍기만 하던 이반은 장미의 전설을 함께 이야기하며 비로소 눈을 맞춘다. 빅토르 역시 정원에서 지나를 만난 후 아프로디테와 아도니스의 신화를 바탕으로 ‘아도니스의 정원’을 쓴다. 모두의 감정이 폭발했던 한 여름의 정원을 찬양하는 가사가 자주 흐르고, 모두가 떠난 후 황폐해진 정원을 향한 쓸쓸함도 음악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실제로 관객이 보는 정원은 빈약하기만 하다. 무대 바닥에는 흩날린 꽃잎의 형상을 구현했고, 벽의 담쟁이덩굴은 다양한 조명을 받아 여름의 신록과 가을의 낙엽을 표현하기도 한다. 무대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효과를 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장미로 만발한 붉은 정원의 클라이맥스는 여러 한계 상 영상으로 대체될 수밖에 없으며, 벅찬 감동을 표현하는 배우의 연기와 음악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함께 감동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관객의 상상과 리얼리티 사이 어딘가에서 길을 잃고 헤맨다. 재공연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정원은 작품 속 그 어떤 것보다도 연출의 과감한 선택이 필요한 부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