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달콤한 나의 도시> 속 ‘원색이 되고 싶은 무채색’ 은수의 삶에서 삐죽 도드라진 선배 하나가 있었다. 출근할 때마다 칼로리를 줄줄 꾀면서도 자기 돈으로는 커피 한잔 빼먹지 않고, 빡빡한 일에는 은근히 말을 돌려 스리슬쩍 빠져버리곤 하던 그 밉상 선배. 그런데 그 선배가 마냥 얄밉기만 하지 않았던 건 누군가에게 내가 바로 그런 선배일수도, 내 곁에 정말 그런 선배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기시감 때문이었다. 지독히 뻔한 표현인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그 장선배가 바로 뮤지컬 배우 오나라다.
“정말 밤새더라구요. (웃음) 저도 한 3일 정도를 새본 적이 있었는데 저는 그것도 너무 재밌었어요. TV에서 ‘저 오늘 밤새서 너무 피곤해요’라고 말하는 것도 부러웠거든요. 해보고 싶었던 것을 하니까 몸의 고통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고 너무 행복하더라구요. 잠 못 자는 게 뭐 대순가? 하하” 그녀는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것 하나까지 최선을 다하고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제가 가진 것에 비해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오나라라는 사람을 돌아보면 정말 이런 사랑을 받을 만큼 잘하나 싶은데 아니거든요. 그래서 하고 싶어 하는 일을 이렇게 행복해하면서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감사해요.” 뮤지컬계에서는 ‘로맨틱 코미디의 여왕’이라고 불리지만, 3년째 아이들을 위한 KBS <파니파니>에 출연하는 것에 대해서도 “정말 불가사리를 비롯해서 안 해본 동물이 없는데 언제 이런 연기를 해보겠어요. 며칠 전에는 어린이날에 홍길순으로 변신해서 액션연기도 선보였어요. 너무너무 재밌어요”라고 환하게 웃는다.
“워낙 답답한 것을 못 참아서 해보고 싶었던 것들이나 궁금한 것들은 직접 다 해봐야 되는 성격”의 오나라가 선택한 뮤지컬은 바로 <형제는 용감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역시 덧붙인다. “극중 ‘오로라’라는 캐릭터 이름 때문에라도 이 역할은 정말 꼭 해보고 싶어요. 하하”
경북 안동에 위치한 안동이씨 종갓집에는 경마-주식-다단계 3종세트로 속을 썩이던 종손 ‘썩을 놈’ 석봉이와 기둥뿌리 뽑아가며 공부시켰더니 데모에 참여해 집안에서 유일하게 전과자 신세가 된 ‘죽일 놈’ 주봉이 두 형제가 있다. ‘호적에서 파버리자’며 종친들이 혀를 내두르던 두 형제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꼬장꼬장하고 고집만 센 아버지와 3년째 연을 끊고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부고소식을 접하고서야 안동에 내려오게 되고 매일 ‘코브라 트위스트’를 걸면서 싸우기에 급급하던 두 형제는 부모님의 감춰진 진실을 알게 되면서 화해하게 된다. 자지러지게 웃다가 머리가 띵해져올만큼 눈물을 쏙 빼놓는 이 작품은 지난 제3회 <더 뮤지컬 어워즈>에서 극본상과 작사작곡상을 수상했다.
“<형제는 용감했다>의 장유정 연출하고는 <김종욱 찾기>도 같이 했지만 저랑 코드가 잘 맞는 것 같아요. 이 작품은 감동도 있지만, 그 안에서 재미 역시 놓치지 않거든요. 그리고 뮤지컬 중에서 온 연령대를 커버할 수 있는 작품들이 흔치 않은데, <형제는 용감했다>는 모든 세대를 아우를 수 있겠더라구요. 상중에 벌어지는 일인만큼 한국 정서에도 잘 맞는 것 같고, 해외에 나가도 신기해하면서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아요.” 요즘에는 쉽게 볼 수 없는 요란한 곡소리와 마지막을 수놓는 꽃상여 등의 전통적인 장례절차들이 형제의 이야기와 함께 펼쳐지며 극을 단단하게 조여 준다. “특히나 그 중에서 ‘오로라’ 캐릭터를 너무 해보고 싶어요. 오로라는 형제를 이어주는 미스터리하고 섹시한 변호사로 등장하는데, 2막에서는 나이와 감정의 변화를 물 흐르듯 보여주는 엄마로 등장하거든요. 그런 부분들이 저에게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여배우들이라면 한번쯤 모두 탐을 낼 것 같아요.” 종친의 B-boy에 열광하던 1막이 끝난 후, 관객들의 훌쩍이는 소리로 객석을 가득 차게 만들었던 2막 어머니의 독백과 아버지의 담담한 유언이 떠올라 울컥한다.
최근 오나라는 1년 3개월 만에 뮤지컬 <김종욱 찾기>로 돌아왔다. “1년 넘게 공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이 작품만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더라”라고 웃을 만큼 그녀와 <김종욱 찾기>는 샴쌍둥이처럼 붙어있다. 지금까지 그녀가 만난 ‘훈남의 계보’ 김종욱만 해도 엄기준, 오만석, 김무열, 김재범, 김태한 등 10명이 훌쩍 넘는다. 이제는 어떤 배우가 와도 다 맞출 수 있는 노하우가 생긴 것 같다며 환하게 웃던 그녀의 다음 작품은 오래간만에 2007년 초연 멤버들이 함께하는 뮤지컬 <싱글즈>다. 다시 만나는 나난, 수헌, 동미, 정준이 2년 사이 어떤 변화들을 겪으며 성장했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올 하반기에는 뮤지컬 무대 외에도 전혀 다른 곳에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 로맨틱 코미디 작품 중에 너무 하고 싶은 배역이 있어서 오디션을 보고 있거든요. 어떻게 될지 모르겠고 안 되도 성격상 크게 좌절하거나 하진 않을 테지만, 저 정말 너무너무 하고 싶어요. (웃음) 전 로맨틱 코미디의 여왕이잖아요. 하하”
넘버
‘난 니가 싫어’
“얘기하면 다들 아~하고 기억하실꺼에요.” 어릴 때부터 명석한 동생만 챙긴다고, 장남인 형만 챙긴다고 으르렁대기 바빴던 형제가 안동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의 영정사진 앞에서 또 싸운다.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이라고 시작되는 영화 <공포의 외인구단>의 주제곡을 패러디 한 건데 정말 너무 적절하게 잘 들어가 있어요. 형제가 둘이 막 싸우다가 노래를 부르는데, 그런 상황에서는 록이라들지 좀 센 코드의 노래가 나올 법도 한데 발라드를 부르거든요. 반전이 있어서 너무 기억에 남아요.” 싸우면서도 특유의 R&B 선율과 과장된 몸짓이 관객들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는 장면이다. 36살 형과 31살의 동생은 나이가 들어도 ‘내 과자 뺏어먹고, 내 구슬 뺏어갔다’며 투닥거린다. 그리고 그 모습은 영락없는 어릴 적 우리 남매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