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3월의 눈>, 이것은 연극이 아닌 인생입니다 (텐아시아)

커다란 곰인형을 들고 “TV에 나온 상고재”를 찾는 데이트족과 연신 “스고이”를 외치는 외국인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북촌 그 어디매쯤, 여든을 훌쩍 넘긴 장오(장민호)가 살고 있다.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는 봄이지만 장오는 지금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정든 집과도, 유일한 혈육인 손자와도, 자신의 남은 생과도. 손자의 빚 청산을 위해 장오는 집을 팔았고, 덕분에 한옥은 조각조각 해체됐다. 이제 그곳엔 카페가 들어설 예정이다. 변화의 시기, 더 이상 효용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옛것들은 박물관에 가둬지거나 버려진다. 쌀집도 이발소도 주거공간으로서의 한옥도 그리고 인생도.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준 한옥과 장오에게는 앙상한 뼈대와 가방 하나로 정리되어져버린 몇 년만이 남았고, 벼랑 끝에 매달린 듯 위태롭게 흔들린다. 하지만 장오는 그 집에 새하얀 문풍지를 다시 바른다.
지금, 당신의 인생을 돌아보라 9
연극 <3월의 눈>은 장오와 이순(백성희)을 통해 한 세대가 저물어가는 모습과 그 안에 깃든 삶의 깊이,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다루는 작품이다. 특히 이번 공연은 국립극단이 반세기 이상 연극계를 굳건히 지켜온 원로 연극배우 백성희, 장민호에게 바치는 헌사로, 두 배우는 깊은 눈빛과 시선으로 화답하며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해낸다. 누가 장오이고 누가 장민호인지 알 수 없는 완벽한 물아일체의 경지는 관객들을 진짜 인생으로 초대한다.
툇마루에 오르려면 대들보에 묶어놓은 끈을 잡고 올라서야 하고, 걷기 위해서는 두 발이 함께 포개졌다가 떨어져야 한다. 남들보다 몇 단계의 과정을 더 거치는 여든의 육신만큼 연극은 시종일관 느릿느릿하다. 하지만 그 느릿함이야말로 한옥의, 그리고 이 연극 <3월의 눈>의 절대적 매력이다. 이번 작품의 극작을 맡은 배삼식 작가는 연극 <하얀 앵두>와 뮤지컬 <피맛골 연가>에서 보여준바 있는 상실과 순환의 불교적 세계관을 다시 꺼냈다. 특히 전작에 비해 <3월의 눈>은 그 어떤 군더더기도 없이 촘촘하고 깔끔하게 재단됐다. 장오의 하루를 담담하게 그렸으되 결코 지루하지 않았고, 70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작품 속에 숨어있는 많은 상징과 복선은 되려 깊은 사유의 시간을 선사한다. 너른 대청만큼 넓은 품으로 모두를 껴안는 노부부의 일상은 눈처럼 조용히 시작되어 묵직하게 가라앉는다. ‘2011 국립극단 봄마당’의 시작을 알린 <3월의 눈>은 3월 20일까지 용산구 서계동에 마련된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계속된다. 이후 같은 공간에서는 김광보 연출의 <주인이 오셨다>와 일본연극 <핫페퍼, 에이컨 그리고 고별사>가, 소극장 판에서는 ‘단막극 연작 시리즈’ 총 3작품(<파수꾼>, <흰둥이의 방문>, <전하>)과 박해성 연출의 <황혼의 시>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