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영애(김현숙)는 참는다. 사장(서성종)과 과장(임기홍)이 여직원들 앞에서 야동을 주고받아도, 후배 태희(김유영)가 미모를 무기로 자신의 성과를 쉽게 가져가도, 하나뿐인 동기 지원(백주희)에게 어렵게 털어놓은 비밀이 새나가도 그는 묵묵히 일을 한다. 깨어 있는 시간의 반 이상을 함께하는 공간에서 남의 돈 받고 살려면 어쩔 수 없다. 해프닝으로 끝난 ‘썸씽’에도 아무렇지 않게 일해야 하고, 디자이너지만 대금결제가 밀리면 방앗간에 독촉전화도 해야 한다. 홀로 아이디어를 내고, 그 아이디어 때문에 또 혼자 야근을 한다. 복사기 수리나 정수기 물통 교체 역시 영애 몫이다. 불합리한 일들이 계속될 때마다 불만을 털어놓지만 그때뿐이다. 발버둥쳐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서른하나 7년 차 회사원 영애는 알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전신거울급 공감 8
2007년 방송을 시작한 tvN <막돼먹은 영애씨>의 미덕은 공감과 대리만족에 있었다. 변태를 소탕하고,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내뱉고, 시즌이 거듭될수록 다양한 남자들과 연애를 하던 드라마 속 영애는 언제나 닮고 싶은 언니였다. 하지만 지난 11월 공연을 시작한 동명 뮤지컬 속 영애는 애써 민낯과 다닥다닥 붙은 살을 보여주지 않아도 훨씬 더 현실적이다. 이는 뮤지컬을 드라마의 재현이 아닌 ‘오피스 뮤지컬’이라는 명확한 콘셉트로 재조립했기에 가능한 지점이다. 뮤지컬은 광고 PT라는 굵직한 사건 사이 영애의 소소한 일상을 잽처럼 끼워 넣으며 촘촘한 100분을 만든다. “퇴근해서 오래 살고 싶어” 같은 생활밀착형 대사와 결제판을 이용한 안무가 흥을 돋우고, 배우들의 찰진 호흡 안에서 드라마 속 윤 과장의 아부와 정지순의 진상을 합쳐놓은 듯한 박 과장(임기홍)의 활약은 눈부시다.
하지만 이 뮤지컬의 진짜 미덕은 오히려 영애의 자기 긍정에 이르는 과정에 있다. 극 초반 영애는 “내 인생 봄날이 오긴 올까”라 노래한다. 지금의 영애를 지배하는 것은 무기력이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덩어리’라는 별명은 사라지지 않고, 경쟁사에 지기만 하는 회사 사정은 나아질 줄 모른다. 우연히 다른 가능성을 발견해도 스스로의 능력을 재단하기 일쑤인 그에게 용기와 의욕 대신 한숨이 함께한다. 그런 영애를 이끄는 것이 신입사원 원준(최원준)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영애가 그에게 마음을 품어서가 아니라, 야근하라는 말에 “야근이다!”라며 조용히 감탄하는 그를 통해 초심과 작은 희망을 퍼 올리기 때문이다. 결혼 못한 여자의 세계는 남자를 중심으로 돈다는 세상 수많은 콘텐츠에 영애 씨는 하이킥을 날린다. 그럼에도 여전히 회사 식구들은 교회 전단 하나를 위해 성가대에 출석한다. 하지만 “못생기고 뚱뚱하면 소용없어”라 노래하던 영애는 어느새 “나는 꿈꾼다 내일을”이라 외치고, 동료들은 서로의 영역과 재능을 인정하고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음으로써 앞으로 나아간다. 작지만 유의미한 변화에서 관객도 꺼져버린 작은 불씨에 조용히 바람을 불어넣는다. 무기력과 자격지심에서 벗어난 꽃보다 아름다운 영애 씨,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