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건 다 빌려 쓰는 거니까.” 뮤지컬 <렌트>에서 무언가를 소유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집세를 내지 못하는 가난한 예술가들은 대본과 포스터를 태워 추위를 녹인다. 도난당한 옷은 좌판에서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고, 집을 가진 자도 자유는 갖지 못했다. 사랑과 믿음도 수시로 깨지고, 삶도 종국엔 끝이 난다. 하지만 그들은 대본 없이도 카메라를 돌려 현실을 기록하고, 철거 반대 시위 공연을 한다. 싸운 후에는 어김없이 화해를 하고, 에이즈라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두려워하는 옆 사람의 손을 잡아준다. 그럼에도 결국 누군가는 죽는다. <렌트>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내 것이라 생각했던 무언가가 언제나 내 것이지 않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에도 끝이 있다는 것. 그러니 일상과 마음을 소중히 대하며 오직 오늘을 살 것.
또렷한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렌트>는 다수의 한국 관객과 거리가 멀었다. <렌트>가 다루는 에이즈, 동성애, 마약중독이라는 소재는 주제로 들어가는 데 높은 진입장벽이 됐다. 키스를 나누는 동성커플과 마약을 사고파는 현장,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안무와 트랜스젠더를 대하는 세상의 시선 등 <렌트>의 장면들은 변화한 사회만큼 익숙하고 딱 그만큼 낯설다. 대신 뮤지컬은 이들의 상황에 집중하며, 친절한 번역과 설명을 통해 관객이 외형적 설정이 아닌 내면을 들여다보도록 돕는다. “우린 뉴욕 맨해튼에 있는 재개발 구역의 한 모퉁이에 살아요. (중략) 이 건물 밖 공터엔 작은 천막촌이 있어요. 이 안은 엄청 추워요. 난방을 할 돈이 없거든요.” 관객은 마크의 목소리로 불안정한 거주의 괴로움을 상상하고, 에이즈 환자의 “지쳐요. 헛된 희망의 말들” 같은 가사 속에서 불안과 공포라는 보편적 감정을 확인한다. 가사는 종종 직접적으로 들리지만, 같은 이유로 <렌트>는 더 많은 이와 공감대를 나눈다.
9년만의 재공연이라는 특별함을 제외하더라도 이번 <렌트>가 다르게 느껴지는 데는 시대의 영향이 크다. 모두가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시대를 산다. 배우들은 개인의 삶에서 경험한 막막한 현실의 감정을 인물에 쏟고, 이를 통해 작품은 무언가를 매끄럽기 다듬기보다는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는 에너지가 곧 생이라 말한다. <렌트>에서 중요한 것은 연대다. 인물의 관계는 말보다는 손을 잡고, 어깨를 쓰다듬고, 눈을 마주치는 물리적인 움직임으로 표현된다. 죽음의 공포를 여러 명의 돌림노래로, 혼자 부르던 부랑자의 크리스마스 캐럴이 합창이 되는 음악적 장치들은 ‘연대’의 메시지를 구체화하는 힘이다. 공연의 끝, “두려워하지 마. 삶을 놓치지 마. 또 다른 길, 내일은 없어. 오직 오늘 뿐”이라는 가사와 함께 <렌트>의 연습 영상이 무대에 펼쳐졌다. 작품의 서사가 더해진 이 짧은 영상은 서로 다른 다수가 공동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으로 읽히며 연대의 메시지를 현실로 확장해낸다.
2020년의 <렌트>는 배우들의 에너지와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는 연출을 통해 사랑과 위로의 메시지를 뜨겁게 전달한다. <렌트>가 바로 지금 여기의 이야기로 읽힌다면, 모두가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살아있다’는 감각을 깨우며 연결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때로는 시대가 작품을 리부팅한다. 언컨택트 시대가 아니었다면, <렌트> 속 인물들처럼 불안을 나누고 용기를 주고 함께 노래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잊었을 것이다. 그러니 역시, 오직 오늘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