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싸우면서 자란다. 싸우면서 자란 아이는 이내 어른이 되고, 그 어른은 다시 아이들의 싸움을 거들고, 스스로와 싸우며 또 그렇게 나이를 먹는다. 연극 <대학살의 신>(Le Dieu du Carnage) 속 네 남녀의 싸움도 처음엔 그들 부부의 11살짜리 아이들에게서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패거리에 들어가느냐 마느냐를 놓고 싸움을 했고, 결국 패거리 리더의 이가 두 개 부러지면서 상황은 종료됐다. 하지만 연극의 시작은 종료와 함께 찾아온다. 가해자와 피해자 부모가 거실에 모였다. 아프리카 다르푸르 분쟁에 대한 책을 저술중인 피해자의 어머니 베로니카(오지혜)는 아이들의 싸움에 ‘중무장’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며 가해자 부모를 은근히 코너로 몰아가고, 이에 질세라 가해자의 아버지 알렝(박지일)은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는 심보로 이야기를 들은 척 만 척하고 있다. 남편 미셸(김세동)과 아내 아네트(서주희)는 어떻게서든 상황을 정리하고 싶어 하지만, 그들 역시 그동안 배우자에게 쌓였던 감정을 토해낸다. 결국 고상한 척 나란히 앉았던 네 남녀는 사각의 링과도 같은 거실에서 글러브와 헤드기어 없이 서로에게 욕지거리를 내뱉고, 구토를 하고, 물건을 내던지며 격렬한 싸움을 이어나간다.
위선의 세계, 가면을 벗으면 자유로워질지니 6
<대학살의 신> 속 인물들은 보편성을 가졌다. 직업과 성향이 각기 다르고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지만, 사실 네 남녀 모두는 스스로를 포장하는데 급급해있다. 자신을 숨긴 채 서로에게 적당한 선을 긋고, 허용 가능한 범위 내의 이야기를 나누며, 끊임없이 상하관계를 재탐색한다. 뜻이 같은 경우엔 상대편이라 할지라도 손을 잡았다가, 다시 수가 틀리면 가열찬 독설을 퍼붓는 관계. 그야말로 위선으로 뒤범벅된 가면의 세계를 소통의 부재와 함께 그려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고상했던 이들이 변해가는 모습에 당황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바로 우리 자신을 그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90분가량 진행되는 이 작품은 무대전환도, 배우들의 등ㆍ퇴장도 거의 없지만 쉽게 지루해지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보편적인 텍스트의 힘은 기본이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것은 배우들의 에너지이다.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못지않은 속사포 같은 대사들은 김세동, 오지혜, 박지일, 서주희 네 배우의 입을 통해 하나의 거대한 핑퐁게임이 되었고, 베테랑 배우들의 과장되지 않은 무대연기는 극에 순식간에 몰입하도록 도와준다. 특히 “자신의 단점만을 다 모았다”는 베로니카 역의 오지혜와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드는 핸드폰 벨소리의 주인공 알렝 역의 박지일의 연기가 돋보인다. 연극 <대학살의 신>은 대학로 예술극장 대극장에서 5월 5일까지 공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