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에게는 장애가 있어요.” 조승우·김미숙 주연의 영화 <말아톤> 이후 15년이 지나고도 장애인을 다룬 드라마나 영화를 찾기가 어렵다. 이들이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장애인은 픽션의 세상에서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 등장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많은 콘텐츠는 이들의 ‘인간 승리’나 장애인을 돌보는 비장애인에 초점이 맞춰있는 경우가 많다. 장애인을 다루되, 장애 당사자의 목소리는 배제되어 왔다는 말이다.
연극 <템플>은 자폐를 갖고 살아가는 템플 그랜딘의 삶을 다룬다. 작품은 보호 시설에서 평생 살 것이라는 진단을 받은 템플이 어떤 교육과정을 거쳐 세계적인 동물학자로 성장했는지에 집중한다. “템플 그랜딘의 또 다른 자서전”이 되길 희망한다는 심새인 연출가의 말 그대로, 연극은 템플의 사고와 감정, 목소리를 그대로 다루는 데 중점을 둔다. 그의 조력자인 엄마와 칼록 선생님도 등장하지만, 연극은 그들을 영웅시하지 않는다. 장애 가족을 바라보는 현실의 차가운 시선 역시 다음 단계를 위한 상황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태어나 여러 어려움을 만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며 성장한다는 면에서 템플은 특별하지 않다. 그러나 <템플>은 특별하고, 그 특별함은 인물이 아닌 연극의 표현 방식으로부터 비롯된다.
한국과 스위스, 영국에서 오랫동안 무용을 하며 언어보다는 비언어적 요소로 사고하는 것이 익숙했던 심새인은 단어와 사물을 시각으로 인지하는 템플과 동질감을 느꼈다고 한다. 작품의 포인트를 여기서부터 착안한 연극은 템플의 상황과 심리, 감정을 ‘움직임’으로 담아낸다. 템플이 세상을 경험하며 느꼈을 설렘과 기쁨, 답답함과 공포 등의 감정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낸 셈이다. 수시로 하늘을 나는 행동을 하거나, 몸을 잔뜩 비틀거나, 한 방향으로 걷지 않는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돌발행동처럼 보인다. 그러나 <템플>은 모든 상황을 템플의 입장에서 소개함으로써 관객이 일반적인 사고 너머, 장애인의 시선으로 상황을 인지하고 상상하도록 돕는다. 하늘을 나는 행동은 기쁜 일이 있어서이며, 몸을 비틀어서 만드는 것은 알파벳이다. 일정하지 않은 보행 역시 템플이 불안하다고 느끼는 물질을 피하는 과정일 뿐이다.
움직임이 표현하는 것은 템플의 감정만이 아니다. 배우들의 몸은 모여서 의자가, 차 안이 된다. 수없이 많은 공간과 사물이 움직임을 통해 구현되고 연극적 환영 안에서 관객들은 그 상황을 함께 경험한다. 연극의 움직임은 타인의 행동을 구현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템플이 날기 위해서는 3~4명의 도움이 필요하다. 템플의 자유는 그를 돕는 타인의 행동을 통해서이며, 템플 역시 상대를 완벽하게 믿어야만 하늘을 날 수 있다. <템플>에는 서로가 단단하게 결합되어야만 가능한 동작들로 가득하다. 템플을 비롯해 등장하는 배우 모두가 혼자서는 무엇도 만들어낼 수 없다. 우리 모두는 느슨하고도 가깝게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를 존중하고 믿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템플>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템플이 두려움과 편견을 상징하는 다양한 손을 스스로 뿌리치고 거대한 문을 직접 여는 결말에 이른다. 이를 통해 연극은 모두가 불편함 없이 살아가는 터전을 위한 타인과 사회의 노력을 담아내면서도 결국 선택은 개인의 몫이라는 주체성을 강조한다. 이것이 <템플>이 비단 템플만의 이야기가 아닌, 모두의 이야기인 이유다.
<템플>은 연극의 새로운 표현방식을 꾸준히 탐구해온 공연배달서비스 간다의 작품으로, 2019년에 초연되었다. 짧은 공연기간에도 많은 호평을 받았던 연극이 재공연을 준비 중이다. 템플을 활발하고 사랑스러운 소녀로 만들어낸 김주연과 내면의 다양한 감정을 무대에 펼쳐낸 엄마 역의 유연도 함께다. 관객의 다수가 비장애인일 것이다. 연극을 통해 장애인의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고, 비장애인으로서 가져야 할 태도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공연은 2020년 9월 12일부터 20일까지 고양아람누리 새라새극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