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두결한장>, 배우 송용진 (텐아시아)

트렌스젠더, 양성애자, 동성애자. 뮤지션, 배우, 제작자. 하나도 제대로 해내기 어려운 독특한 캐릭터와 직업을 뚝딱 해내는 이는 송용진이다. 6월 한 달, 그는 연극 <칠수와 만수>와 뮤지컬 <셜록 홈즈>를 공연했고, 7년 만에 쿠바 3집을 발매했으며, 영화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이하 <두결한장>)으로 스크린에도 등장했다. 특히 그의 첫 번째 영화인 <두결한장>에는 그동안 비슷한 성향의 <헤드윅>, <록키 호러쇼>에서 보여주었던 것과는 또 다른 송용진의 얼굴이 서려 있다. 이석의 매력은 흔들리는 연인을 안아주는 너른 품과 상처에도 지지 않는 단단한 마음에서 나왔고, 이석은 스스로의 장단점을 꿰뚫고 욕망하는 일을 기어이 실현해내고야 마는 송용진에게서 나왔다. 생활계획표를 그리면 잠자는 4시간을 빼고는 촘촘하게 쪼개져 있을 그를 공연과 무대인사 사이에 만났다. 오래된 습관은 집중력으로 이어졌고, 거침없는 화법은 바다처럼 넓고 시원했다.
개봉 후 <두결한장> 번개 제안을 여러 번 했던데 첫 영화라서 많이 설레나보다. (웃음)
송용진: 개봉 전에는 시사회 때마다 자리 없냐고 난리를 쳤었다. (웃음) 이 스크린에서 내리면 TV 모니터로 봐야 되는데, 나는 극장에 걸려있는 그 모습을 머리에 좀 더 각인시키고 싶었거든. 최근에 통신사 VIP 카드를 받았는데 CGV 6번이 무료길래 그거 그냥 다 우리 영화에 쓸려고. 하하하.
지금이야 영화를 영화로 즐기게 된 것 같지만, 처음에 봤을 때는 어땠나.
송용진: 마냥 신기했다. 영화를 워낙 좋아해서 항상 봤으니 스크린에 내가 나왔으면 싶었는데 내가 나오는 거니까. 근데 사실 LGBT 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됐을 때는 너무 힘을 주고 봐서 속옷까지 다 젖을 정도로 식은땀을 죽죽 흘렸다. 영화를 보고나서도 대체 뭘 봤지 싶을 정도로. 나만 나오면 숨고 싶고, 죽고 싶고, 미칠 것 같았다. 그러다 여러 번 보면서 나만 보이던 게 다른 배우들도 보이고 전체적으로 보이게 되면서 앞으로는 즐기면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래도 현장성을 가진 뮤지컬무대에 비해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어도 ‘지금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라는 점이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을 것 같다.
송용진: 말 그대로 공연은 내가 몸으로 때울 수 있는데, 이거는 놔버린 거니까. 돌이킬 수도 없고. 무대 올라가기 전의 긴장감과는 또 다르더라. 근데 이 느낌을 즐기고 있다. (웃음)
며칠 전 언론시사회 현장에서 과거엔 호모포비아였다고 고백을 했더라.
송용진: 난 원체 마초적인 성향도 많고, 남중-남고 다니면서 완전 날라리에 나쁜 거 제일 먼저 하는 그런 애였다. 여자 같은 애는 나에겐 타깃이었다. 남자가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교육을 받고 자랐으니까. 그러다가 2002년에 영화 <헤드윅>을 보고, 특히 뮤지컬을 하면서 그런 부분에서 많이 깨졌다. 다름을 인정하는 법을 깨닫게 되면서 내 삶에 큰 변화가 생겼다.
언제나 <헤드윅>을 인생의 영화로 뽑는 이유가 거기 있었나보다.
송용진: 난 늘 <헤드윅>을 대표작이 아니라 출세작이라 얘기한다. 영화가 2002년에 개봉했는데, <헤드윅>에는 알 수 없는 치유의 힘이 있다. 나도 그때가 가장 상처를 많이 받았던 때였다. 돈이 아예 없었고, 배신도 많이 당했다. 영화를 보고 바로 ‘헤드헤즈’가 됐다. 그리고 원래 이벤트 같은 걸 아예 안 하는데 처음 신청해서 당첨된 게 <헤드윅>이었다. 그때는 공연이 있어서 못 보고 이후에 나중에 쿠바 기타리스트 (이)정우 형네 집들이 가서 (오)만석이 형이랑 DVD를 봤었다. 근데 뮤지컬까지 하게 되고. 그래서 난 스스로 그렇게 믿는다. 이건 인연이라고. (웃음)
고정관념을 타파하는데도 많은 도움을 줬을 것 같다.
송용진: 영화 <록키 호러 픽쳐쇼>도 굉장히 좋아하는데 예전에 뮤지컬을 만든 리처드 오브라이언과 화상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1시간 정도 영국에 있는 칠십 먹은 노인네랑 얘기를 했는데 고대 철학자 찾아가서 깨달음을 얻는 제자가 된 기분이었다. 게이인가 바이인가를 물어봤었는데 자기는 이 지구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성이라고 얘기하더라. 그 얘기를 듣는데 난 아직도 많은 고정관념에 휩싸여 있구나, 그래도 이 판에서는 나름 깨어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멀었구나 싶더라고.
이번 <두결한장>의 석을 보니 그동안 했던 작품들과는 같으면서도 다른 느낌이 많았다. 록사운드를 기반으로 한 작품들이 많아 아무래도 과장된 지점들이 있지 않았나.
송용진: 그 고민이 있었다. 게이 캐릭터인데 내가 어디까지 가야 되는가. 언니들처럼 해야 되냐고 계속 물었지만 감독님은 최대한 그런 걸 없애고 자연스럽게 가길 원하셨다. 그래서 나 역시 내추럴하되 섬세하게 표현하려고 했다. 대신 게이들이 서로 모여 있을 때 눌려있던 것을 드러낸다고 해서 수영장 신에서는 좀 그런 모습을 보여주긴 했다.
사실 석이 ‘훈남’이라는 설정도 크게 부담되었을 것 같다. (웃음)
송용진: 만화 봤나? 그건 완전 소지섭이잖아 소지섭!! 내가 얼마나 난리를 쳤는지. 이거 장난하세요? 성형을 시켜주시든가! (웃음) 영화 찍기 전에 세팅 다 해놓고 모니터를 했었는데, 그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 살 많이 빼야겠더라고. (웃음) 눈으로 확인하니까 안 되겠더라. 평소에도 복싱이랑 축구를 하고 있지만 운동가지고는 되질 않아서 극한의 음식조절로 11kg을 뺐다. 영화는 마르면 마를수록 좋더라고. 그래서 영화 보면 얼굴이 들쭉날쭉하다. 첫 촬영 날이랑 마지막 촬영 날이 아예 다른 사람이었다고 보면 된다.
촬영순서를 계산하고 다이어트 하진 않으니까.
송용진: 감정적으로도 그게 영화를 찍으면서 가장 힘든 부분이었다. 둘이 얘기하면 카메라가 여러 대 있어서 다 찍는 줄 알았을 정도로 영화촬영에 아무것도 몰랐으니 촬영순서도 그렇게 섞이는지 몰랐다. 촬영시작 하기 전 계속 감독님한테 영화가 처음인데 대체 뭘 준비해야 되냐고 물어봤었는데 그냥 편하게 하라고만 하셨다. 근데 해보니까 그게 아니더라. 적어도 배우가 처음부터 끝까지 감정이 딱 서있어야 된다. 공연은 한두 달 연습하면서 감정을 만들고, 또 공연이 시작되면 순서대로 하면 되지만 영화는 아니다보니 어려운 부분들이 있었다. 게다가 무대에서만 연기한 사람이라 상대배우가 연기를 안 해주면 연기가 잘 안 되기도 했고. 시스템적으로 낯설었는데 또 찍을 기회가 있다면 지금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거다.
익숙치 않은 시스템 안에서 적응은 어떻게 했나.
송용진: 감독님은 (김)동윤이랑 나중에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연기 못 하게 되니까 우정을 나누지 말라고 했지만 만날 지겨울 정도로 낚시 얘기하고 그랬었다. (웃음) 촬영장 팀워크가 너무 좋았다. 사실 현장에서 제일 힘들 사람이 감독일 텐데 우리 감독님은 먼저 분위기 띄우고 칭찬을 참 많이 해주셨다. 만약 나한테 막 뭐라고 했다면 스트레스 받아서 연기 못 했을 거다.
굉장히 자신감 넘쳐 보이는 사람이라서 주변 얘기에 크게 신경 안 쓰는 줄 알았다.
송용진: 물론 안 좋은 소리 들으면 오기가 생기기도 한다. 근데 그래가지고는 좋은 거 안 나온다. 사람이 누구나 잘한다 잘한다 소리 들어야 자신감도 생기고 그러지. 사실 나는 보이기에만 그렇지 원래 자신감이 많은 사람은 아니다. 굉장히 내성적이고 소심한 편인데 무대에 올라가면 그냥 하는 것뿐이다. 얼마나 떠는데. 다행히 무대는 객석과 같이 만들어 나가다보니 그런 관객분위기에서 힘을 얻는 게 있다.
음악으로 먼저 시작했는데, <두결한장>도 그렇고 최근에 연극 <칠수와 만수>를 하면서 연기에 대한 욕심을 더 드러내는 것 같다.
송용진: 생활연기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 연기에 눈을 뜬 계기가 2번 있는데 첫 번째가 이지나 연출과 <헤드윅>을 할 때였고, 두 번째가 <형제는 용감했다>에서 (박)호산이 형을 만났을 때였다. 호산이 형은 그동안 내가 뮤지컬에서 했던 연기랑 너무 다른 연기를 하더라. 그런 사람이랑 둘이서 연기를 해야 되니까 못 따라가겠어서 형한테 나도 형 같이 연기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그 이후로는 그래서 왠만하면 대극장 작품 들어와도 안 하고 소극장에서 디테일하게 하려고 한다. 특히 <칠수와 만수>를 하면서 좀 더 그런 연기에 다가갈 수 있었던 것 같아서 좋았다.
사실 나름 이 바닥에서 경력도 있고 자신에게 특화된 영역도 있으니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하는 게 창피할 수도 있지 않았나.
송용진: 그렇지 않으면 발전도 없다. 음악이든 연기든 발전하려면 자기 자신에게 냉정해져야 한다. 물론 ‘자뻑’이 있어야 이 일을 할 수 있지만, 스스로에게 냉정해져야 할 때는 냉정해져야 한다. 사람이 완벽할 수 없고 그릇이 다 채워져 있을 수도 없다. 난 빈 그릇을 채워 나가고 그걸 확인해가는 과정이 재밌다. 무슨 일이든지 가파르게 늘진 않는다. 연습을 계속 해도 안 되는데 어느 순간 돌이켜보면 좀 늘어있다. 그 폭이 둘쭉날쭉 하게 되는데 그래도 요즘은 가파르게 올라가는 것 같다는 게 느껴진다.
이번에 발매된 쿠바 3집을 들으니, 이 사람이 음악을 하기 위해 그동안 연기를 한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굉장히 자유롭게 느껴지더라. (웃음)
송용진: 으하하하하하. 예전에는 음악을 하기 위해 돈 벌려고 뮤지컬을 했었다. 진짜로. 그래서 음악은 와이프, 뮤지컬은 애인 뭐 이런 식으로 얘기도 많이 하고 그랬는데 요즘은 그것도 넘어섰다. 그냥 난 예술가고 모든 게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의 수단 중 하나가 되었다. 대신 음악은 내가 중학교 때부터 했으니 벌써 20년이 넘었고 계속 할 거니까 가장 자유로운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그리고 쿠바 음악이 더 그렇기도 하고.
확실히 연기 외에도 또 다른 달란트가 있다는 건 큰 자산이다. 영화와 연극 모두 ‘음악’에 대한 꿈이 있는 캐릭터들이기도 하고.
송용진: 감독님 말로는 이석은 처음부터 날 생각하고 쓴 거라서 음악 하는 애라는 설정이 됐지만, <칠수와 만수>는 아니었다. 2012년에 맞춰 새롭게 각색이 된 건데 난 사실 복싱을 하니까 이걸 어디서 한 번 보여주고 싶어서 (웃음) 복서를 꿈꾸는 이로 하자고 우겼었다. 근데 옛날 애들이야 가진 게 몸뚱이밖에 없으니까 복싱 같은 걸로 인생역전을 꿈꾸기도 했는데, 요즘 젊은 애들은 그게 오디션 프로그램이고 가수여서 그렇게 된 거다. 하지만 내가 음악도 하고 연기도 하고 그러다보니까 공연을 만들 때도 음악, 연기, 연출까지 할 수 있게 된다. 결국엔 앤디 워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거다. 다양한 분야에서 각자가 시너지가 되면서 예술을 창작해 내는 것. 배우로, 뮤지션으로 사는 것도 좋지만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주는 매력이 있다.
그 매력은 끊임없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쏟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지점인데, 꾸준히 그런 것들이 생기던가.
송용진: 응. 배우로만 살다가 지겨워질 때쯤 공연을 만들었다. 권투를 다이어트로 시작했다가 챔피언을 좀 해봐야겠다 싶어서 시합에도 나갔고 2등을 했다. 영화도 하고 싶은 꿈이 계속 있었는데 출연해보니 이제는 영화를 직접 만들고 싶어진다. 난 목표가 생겨야 더 쉽게 움직이는 사람이더라. 그게 삶의 원동력이고 그게 없으면 난 죽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계속 갱신이 된다.
아무래도 많은 일을 혼자서 다 하기 때문에 정리가 안 되거나 했던 적은 없었나.
송용진: 초반에는 되게 힘들었는데 몇 년 이렇게 살다보니 노하우가 생겼다. 잠자는 4-5시간 빼고는 삶이 쉬지 않고 계속 가서 항상 피곤하다. 그 틈새에 운동도 해야 되고 연애도 해야 되니까. (웃음) 대신 순간 집중력이 좋아졌지만 요즘은 극한이구나 싶다. 소멸되는 느낌이 있어서 일정 다 끝나면 바로 다음날 방콕으로 여행 가서 딱 1주일 확 쉬고 오려고 한다. 올해까지는 이렇게 살고 내년부터는 좀 여유를 갖자 싶은데 그래도 분명 남들보다 바쁠 거다. (웃음)
여행 끝나면 또 뭔가를 시작할 것 같은데 (웃음) 다음 목표는 뭔가.
송용진: 40대에는 정말 영화감독을 해보고 싶다. 원래 올해 단편을 찍어보려고 준비하다가 이건 괜히 섣부르게 했다가는 안 되겠다 싶어서 딱 접었다. 내년이나 내후년에 아예 시간을 비우고 15분짜리 음악영화 같은 걸 하고 싶다. 그렇게 하나씩 하면서 나중에는 우리 감독님처럼 장편 데뷔하고 싶다. 사실 지금 최대 고민은 ‘어떻게 하면 영화를 또 찍을 수 있을까’이지만. (웃음)
영화를 다 보고 나왔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G-Voice 멤버들이 처음으로 코러스 연습할 때의 표정이었다. 굉장히 행복해 보였는데, 당신은 언제가 가장 행복한가.
송용진: 새로운 무언가를 하고 그에 대한 반응이 올 때. 그 결과물이 나쁠 때도 좋을 때도 있지만 도전을 할 때가 가장 의욕적이고 행복한 것 같다. 대신 막연하게 헛된 꿈을 꾸진 않고 실현가능한 걸로 꾼다. (웃음) 꿈만 꾸고 노력 안 하고 불평만 하는 거 세상에서 제일 싫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는 부단히 노력하고 몸부림쳐야 이루어진다. 그래서 스크린에 내 얼굴 걸린 걸 보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그럼 그 행복한 일이 어디까지 갔으면 싶나. 한 인터뷰에서 관객 100만 명 넘으면 드랙(이성의 복장, 게이의 여장을 의미) 하겠다고 했던데. (웃음)
송용진: 에이 100은 무슨. 우리는 30만이다. 30만 넘으면 동남아, 50만 넘으면 하와이에 간다. (웃음) 사실 상영관 수가 적은 게 가장 속상하지만, 30만이 넘으면 오래간만에 드랙도 하고 재밌을 것 같다. 간만에 ‘쏭언니’ 한 번 해야지.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