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내일을 기대하지 않는 날이 더 많아졌다. 달라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품는 것도 쉽지 않아졌다. 세상은 거대한 절망으로 가득하고, 무기력이 미세먼지처럼 대기를 덮는다. 하지만 <로빈훗>은 말한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과도한 세금은 제발 감면하소서 / 명분 모를 세금이 너무 많아요 / 억울한 남편 살려주옵소서 / 나라의 법은 대체 누굴 위해 있나 / 하루종일 일만 하는데도 / 배고픈 배는 채울 수가 없네 / 한숨 속에 내일은 오지 않아.”(<로빈훗> ‘새로운 태양’ 중) 이야기가 생명력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보는 사람들의 공감대가 가장 중요하다. 그 지점에서 <로빈훗>은 많은 점수를 얻는다. 오래전 잉글랜드의 상황은 2015년을 살아가는 현재의 우리와 다르지 않다. 나라의 곳간은 비어가고, 빈 곳간을 채우는 건 결국 일벌레 같은 백성들뿐이다. 사치와 가난이라는 단어가 공존하는 시대. 쌓여가는 억울함을 호소할 곳은 없고, 평범한 이가 악인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서러움과 분노를 양분 삼아 등장한 난세의 영웅이 주목받는 건 당연하다.
4월 19일부터 성남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로빈훗>은 영국의 민담에 독일의 음악이 만나 한국적 정서로 재해석된 버전이다. 세금수송마차를 탈취해 백성들에게 나눠준다는 이야기는 <홍길동전>을 연상시킬 만큼 익숙하고, 왕이 되기 싫다며 투정부리는 필립 왕세자와 그런 필립을 반말과 따끔한 언사로 변화시키는 로빈훗은 유사 부자관계라 봐도 무방하다. 분노하는 대중과 각성하는 왕이 있고, 딸을 대신해 살아가는 모정, 이상과 현실 안에서 흔들리는 사랑 얘기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로빈훗>이 강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희망’ 그 자체다. 사람처럼 살 수 있다는 희망. “희망을 빼앗기지 말자”는 로빈훗의 외침은 이토록 무기력한 대한민국에서 얼마나 강력한 판타지란 말인가.
스토리만이 아니다. <로빈훗>에는 관객이 보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이 있다. 2008년 <햄릿>부터 시작된 왕용범 식 ‘액션 활극’은 셔우드 숲, 활과 만나 드라마틱하게 그려진다. 로빈훗 무리에게 “요새이자 성”으로 지칭되던 셔우드 숲은 복잡하게 얽힌 구조물로 극장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깊은 원근감을 구현해낸다. 대중의 분노를 대변하듯 대부분의 뮤지컬 넘버가 합창으로 구성되어 웅장하고 비장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독특한 아이리쉬 휘슬에 맞춰 다리와 발을 재빠르게 움직이며 추는 아이리쉬 댄스는 경쾌하게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가장 친한 친구는 함께 모시던 왕을 배신했고, 사랑하는 연인은 떠나버렸다. 왕을 살해한 자로 누명 씌워져 가족 모두가 몰살당했다. 슬픔과 분노로 감정의 진폭이 큰 로빈훗 역에는 지난 3월 국내 초연을 성공적으로 이끈 유준상, 이건명, 엄기준이 함께한다. 오랜시간 무대에서 연륜을 쌓아온 이들은 작품의 중심을 탄탄하게 잡는다. 다소 비장하게만 보이는 극에 활기를 불어넣고 이야기의 또다른 축이 되는 왕세자 필립은 박성환과 규현이 맡는다. 특히 발라드에서 더욱 도드라지지만, 왕이 되기 싫다며 징징대는 규현의 모습은 기존에 익숙하게 보던 모습과 달라 색다르게 다가온다. 판타지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은 두 시간뿐이다. 하지만 그 두 시간만으로도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다. 로빈훗이 2015년의 대한민국을 찾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