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의 높낮이와 빈부의 격차를 떠나 유일하게 공평한 것이 바로 감정이다. 사회적 지위를 결정짓는 모든 것을 거둬들였을 때 결국 드러나는 것이 희로애락이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산 뮤지컬 <모차르트!>와 <엘리자벳>이 한국에 안착한 이유도 그래서다. 미하엘 쿤체(극작)와 실베스터 르베이(작곡)는 두 작품을 통해 숱하게 회자되는 인물의 삶에서 고독과 자유, 그리고 성장의 키워드를 끌어냈다. 천재 작곡가는 아버지의 그늘과 대주교로부터의 자유를, 황후는 제 손으로 아이 하나 기를 수 없던 인형 같은 삶에서의 탈출을 꿈꿨다. 모차르트에 이어 “자유롭지만 자유롭지 못한 삶”(옥주현)을 살아낸 엘리자벳의 이야기가 2월 9일부터 5월 13일까지 블루스퀘어에서 시작된다.
올해로 탄생 20주년. 황실이 존재하는 일본에서는 이미 16년 전부터 공연되어 왔지만, 상대적으로 한국 관객들에게는 생소한 <엘리자벳>이 한국 초연을 앞두고 지난 17일 연습현장을 공개했다. 그동안 한국에 소개된 많은 라이선스 작품이 남성 캐릭터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것에 반해 <엘리자벳>은 씨씨라 불리던 한 여성의 일대기를 다룬다. 열여섯 소녀가 황후가 되고 이후 예순에 암살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는 만큼, 넓은 스펙트럼을 요하는 엘리자벳 역에는 김선영과 옥주현이 캐스팅되었다. 김선영은 <엘리자벳>의 대표곡 ‘나는 나만의 것’을 통해 비스크 인형처럼 바스라질 듯한 목소리로 시작해 강한 신념으로 변화하는 감정선을 촘촘하게 보여줬고, 옥주현은 아들을 잃은 슬픔을 노래한 ‘행복은 너무도 멀리에’를 통해 특유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를 들려줬다.
엘리자벳과 네 명의 남자들
여성원톱 뮤지컬이라는 점 외에도 <엘리자벳>이 주목받는데는 씨씨를 둘러싼 남자 캐릭터에 있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죽음(류정한·송창의·김준수), 엘리자벳을 암살한 루케니(김수용·최민철·박은태), 한결같이 그녀를 사랑한 황제 요제프(윤영석·민영기)가 각기 다른 매력으로 손짓한다. 특히 죽음은 긴 세월 동안 새장을 벗어나려 했던 씨씨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로, 블랙수트와 짙은 아이라인의 옴므파탈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죽음의 천사를 대동한 등장은 음울하면서도 환상적인 무드를 풍기고, 그의 음악은 대체로 섹시하게 씨씨와 관객을 유혹하며 흐른다. 연습실에서 만난 김준수는 줄곧 지적되어왔던 저음과 가사전달력에서 많은 향상을 보였고, 오랫동안 다져진 춤 실력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뮤지컬 무대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안무를 선보이며 <엘리자벳>을 더욱 뜨겁게 달궜다. 반면 다양한 작품에서 주로 반듯한 인물을 연기해온 송창의의 경우 새로운 변신이 주목된다.
분노를 표출하는 강한 남자 루케니와 우유부단하지만 로맨틱한 요제프, 모성애를 불러일으키는 안아주고 싶은 남자 루돌프(김승대·전동석·이승현)까지. 그야말로 <엘리자벳>은 남자종합선물세트이기도 하다. 오래전부터 엄청난 고음의 ‘밀크’를 손쉽게 소화해온 박은태는 루케니가 되기 위해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고, 송창의와 김준수는 체중감량으로 연기 외적인 부분에서도 캐릭터를 만들고 있다. 눈에 그림이 그려질 만큼 정교하게 작곡된 음악, 호화롭던 황실을 그대로 재현해낸 듯한 세트와 회전무대, 400여 벌이 넘는 다양하고 화려한 의상들로 규모에 있어서도 뒤지지 않는다. 탄생 20주년을 맞이하여 빈에서는 새로운 버전의 <엘리자벳>을 준비중이라는 소식도 들린다. 끊임없이 의심받고, 남편으로부터 “복종도 의무”라는 말을 듣는, 한없이 외로웠던 한 여자의 인생이 여기 있다.